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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근대성’과 전체상 상실에 대한 응답
‘21세기 근대성’과 전체상 상실에 대한 응답
  • 교수신문
  • 승인 2014.05.08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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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_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 김상준 지음 | 글항아리 | 252쪽 | 15,000원

 
나는 이 책에서 유교를 최초의 근대 민주주의자 스피노자, 로마 공화국의 어머니 루크레티아, 그리고 여러 문명권의 前자본주의 사회복지 체제들과 대면시켰다. 과거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미래를 위한 비판적 작업이었다.

 
이 책은 유교가 우리에게 여전히 현재적이며, 그것은 무의식처럼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두고 말한 대로, “그것이 있었던 곳에, 내가 있게 된다(Wo es war, soll ich werden).” 나는 ‘그것(es)’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움직인다. 그것, 즉 무의식은 각종 신경 병증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창조성과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이 책에서 발견한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은 비판성, 윤리성, 민주, 민생, 문명화, 여성화라는 기호들로 요약된다. ‘정치적 무의식’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문화비평서의 제목으로 유명해진 말이기도 하다.

그는 여기서 세계에 대한 전체상을 상실한 포스트모던 문화현상과 사상조류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이를 통해 분석대상에 대한 새로운 전체상을 제시한다. 그 전체상은 후기자본주의의 정치적 무의식으로 풀이된다. 전체상의 상실이라는 현상을 또 하나의 새로운 전체상으로 읽는 통렬한 뒤집기다. 이 책 역시, 제임슨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 되겠지만, 오늘날 우리 의식세계의 전체상 상실, 방향상실에 대한 하나의 대응이자 응답이 됐으면 좋겠다. 이 책에서 발견한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의 기호들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들이 오늘 우리의 신경증과 방향상실을 치유해주고, 내일 내가 설 곳에 대한 영감과 예지로 승화될 수 있기 바란다.

“유교는 치열하게 대면해야 할 묵직한 실체”
이 책은 2011년 출간한 『맹자의 땀 성왕의 피』의 속편이다. 이번 책은 전편에 비해 얇고 읽기 쉽다. 그렇다고 이 책의 내용이 전편에 비해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보다 본격적이다. 전편에서는 우선 유교라는 대상을 제대로 세우는 데 주력했다. 제대로 맞서려면 우선 제대로 세워야 한다. 진지하고 치열한 비판의 상대는 그만큼 진지하고 치열한 내용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 특히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일수록 유교란 낡아빠진 시시한 것이어서, 진지한 지적 이해나 심각한 비판적 분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유교는 우리에게 어떤 최신 서구 사조보다 더욱 진지하고 치열하게 대면해야 하는 묵직한 실체다. 전편에서 이 사실을 입증하는 작업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 변화한 세계 상황도 이 점을 점차 확인해주고 있다. 이 책은 그 묵직한 상대와의 본격적인 씨름이다. 유교의 진정한 공과도 그렇듯 온 힘을 다한 비판적 대면에서 제대로 드러날 것이다.


이 책 말미에 숨겨둔 대목이 있다. ‘21세기 근대성 이론’에 관한 제언이다. 21세기 근대성 이론? ‘근대성(modernity)’이란 포스트모던의 파도가 이미 깨끗이 지워버린 ‘모래 위의 얼굴’이 아니었던가. 한 때 유행했으나 이제는 한 물 가버린 개념, 트렌드 아닌가. 그런데 무슨 근대성 이론? 그것도 21세기에? 서구의 지적 유행에 민감한 어느 세련된 識者들은 물을지 모른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조변석개하는 표면의 파도가 아니라 천년 단위로 변하는 깊은 바다 속 해류를 본다. 포스트모던의 파도가 지우려고 했던 것은 서구의 세계지배 기획으로서의 근대성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근대성의 자기비판이었다. 근대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가 자기시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고,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던의 비판성은 지극히 근대적이었다. 문제는 그 사조의 충격 속에서 잃어버린 역사 감각이었다.


끝난 것은 서구의 세계지배 기획으로서의 근대성이었지, 근대성 자체가 아니었다. 끝난 것은 서구가 세계를 지배했던 근대 세계역사의 제2단계였지, 근대(the modern age)라고 하는 역사적 시대 자체가 아니었다. 이제 근대 세계역사의 제3단계, 아마도 근대역사의 마지막 단계가 될 후기근대의 시대(the late modern age)가 시작되고 있다. 근대의 세계역사는 여러 문명이 동등한 역할을 했던 초기근대를 경과해, 서구의 세계지배로서의 본격근대를 거쳐 이제 비서구 문명권이 다시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후기근대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굴기’는 중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도, 남미, 동남아, 이슬람권에서 공통된 모습이다. 21세기 들어 가장 크고 분명한 변화는 ‘하나의 (지배)중심과 여러 (피지배)주변’에서 ‘여러 중심의 균형과 공존’으로의 이동이다. 후기근대의 뚜렷한 징표다.

비서구문명권의 새로운 가능성
그렇다면 근대 세계역사의 전모가 이제야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아울러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녘에 날개를 편다”고 했던 헤겔의 『법철학』 서문에서의 유명한 경구는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됐다고 말해야 한다. 헤겔이야말로 근대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역사화하고 체계화시킨 대철학자였다. 그는 자신이 근대 역사의 마지막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의 종말’이라는 발상도 여기서 나왔다. 그러나 그가 보았던 것은 서구의 세계지배 기획으로서의 서구 근대성이 비로소 날개를 펴기 시작한 순간이었을 뿐이다.


그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언급한 바로 앞 문장에서 철학이란 회색 위에 회색 칠을 하는 늙은 시대의 작업이라 말했다. 나는 달리 말하고 싶다. 철학은 영원히 새로운, 영원히 젊은 시대의 작업이라고. 헤겔은 자신을 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늙은 목격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하나의 새로운 젊은 시대를 살아갈 새로운 젊은이들, 또 하나의 신청년을 기다린다. 나는 이 책에서 유교를 최초의 근대 민주주의자 스피노자, 로마 공화국의 어머니 루크레티아, 그리고 여러 문명권의 前자본주의 사회복지 체제들과 대면시켰다. 과거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미래를 위한 비판적 작업이었다. ‘또 하나의 신청년들’이 발견해 줄 미래의 유교는 더 이상 마음의 작은 등불로서의 심성유교만이 아닐 것이다. 후기근대의 세계상을 기획할 대담한 정신들의 풍부한 사회·정치·경제적 자원이 될 것이다.


 


김상준 경희대 공공대학원·사회학
필자는 컬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지의 민주주의』, 『맹자의 땀 성왕의 피』 등의 저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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