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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을 만든 드라마틱한 왕위 계승과 개혁이미지
‘아이콘’을 만든 드라마틱한 왕위 계승과 개혁이미지
  • 송승현 객원기자
  • 승인 2014.05.0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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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는 왜 ‘正祖’에 주목할까

▲ 영화 <역린>의 한 장면. 사진출처= 롯데엔터테인먼트/CJ엔터테인먼트
지난 4월 30일 개봉한 영화 「역린」은 신권의 명을 받은 자객이 정조를 노렸던 사건을 다룬다. 정권다툼에 치여 뒤주에서 숨을 거둔 아버지(사도세자)를 여의고 스물다섯에 왕에 오른 정조 1년의 어느 하루를 그렸다. 이 영화는 1993년 출간돼 인기를 모았던 소설 「영원한 제국」과 같은 맥락에서 정조에 접근했다.
그런가하면 지난 2007년 방영된 MBC 드라마 「이산」은 정조 개인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조명했다. 아버지를 여읜 어린 시절부터 그가 성장해 붕당정치의 중심에 선 이야기다.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파문」(1989)과 영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2011) 등 정조와 18세기 조선은 꾸준히 대중문화의 관심을 받은 역사 소재였다.


한국 대중문화는 왜 정조를 꾸준히 불러낼까. 영조와 정조가 나눠 다스린 18세기 조선사회는 붕당정치의 소용돌이를 맞았다. 두 왕은 그 중심에 서있었다. 이 시기, 영조만큼 뜨거운 인물이 정조다. 정조는 권력다툼의 희생(사도세자)을 겪고 왕에 오른 데다 정조 개인의 학술·문화적인 역량, 정치가로서의 개혁과 야망까지 모두 갖췄던 인물이다.

당파 초월해 통합 이루려했던 君主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과)는 “정조가 대중문화의 꾸준한 조명을 받는 건 정조 시대를 개혁과 통합,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박 교수는 “정조가 왕에 오른 18세기 조선은 오랜 기간 정체된 관습과 정치적 비효율성이 가득 찬 시대였다. 동시에 당파로 갈라진 분열의 시대이기도 했다”며 정조를 “비효율을 개혁하고 분열된 조선 정치의 중심을 잡으려 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할아버지인 영조 때부터 봐온 당파싸움은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란 정조의 말을 허투루 볼 수 없는 이유다. 박 교수는 “정조는 18세기 당파를 초월해 정치적 통합을 이루려 했다”면서 “아버지의 원수마저 포용하려 하지 않았나”라고 덧붙였다.


현대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박 교수는 “지금도 국민들 사이에 정치적 불인정이 팽배하다. 집권당이 자기 사람을 요직에 배치하는 모습이나 소외된 세력을 포용하지 않는 모습이 나타난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민중의 삶에서부터 새로운 변화에 대한 갈망이 일어난다”라며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풍성해진 사회지만 정치적 불신과 불안은 여전히 국민들에게 남아있다”라고 바라봤다. 현대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정치적 현실이 대중문화가 정조를 꾸준히 불러내는 이유라는 설명이다.


정조를 둘러싼 복합적인 사정도 대중문화의 관심을 받는 이유가 된다. 김풍기 강원대 교수(국어교육과)는 “개혁은 ‘누가 개혁을 하는가’라는 주체가 중요하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정조가 추구한 개혁의 최종 목표는 ‘유학이 이상적으로 정착하는 개혁’”이라며 “표면적으로는 수구적인 유학에 있지만 정조의 개혁은 당시 정치권을 겨냥했다. 하층민 등의 민중, 벼슬에 나가지 않았던 지식인들에게 정조의 개혁이 인기가 있었던 이유”라는 의견을 냈다.


이어 김 교수는 “현대 대중문화에서 정조를 재조명하는 건 추후 어느 때 어느 시각으로도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정조는 동아시아 정세를 바라보는 시각과 학문·문학적 역량이 뛰어났다. 여기에 왕위 계승 과정도 복합적으로 엮여 꾸준히 대중문화의 관심을 받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와 다른 모습에서 정조를 비출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과)는 “대중문화 작품은 시대마다 무엇을 투영하는가에 따라 시각이 달라진다”라며 “20여 년 전만해도 정조는 정치적 피해자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개혁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라고 지적했다. 그가 지닌 계몽·개혁 이미지를 좀더 꼼꼼히 살펴봐야한다는 설명이다.
안 교수는 지난 2009년 200년 만에 공개된 『정조어찰첩』을 예로 들어 “정조와 심환지가 토론으로 타협점을 찾는 모습을 보면 정조에게서 노련한 정치가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사료가 많아 새 사료가 나올 때마다 대중문화에서 정조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안 교수의 의견이다. 정조를 조명하는 시대마다 현대사회에서 투영하고 싶은 모습을 담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정약용과 심환지 등 정조 시대 개성 강한 인물들이 많았던 점도 대중문화의 집중을 받는 이유다. 정조가 자신의 통치신념(‘모든 사람을 발하게 하라’)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재능을 발현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안 교수는 “정조 사후 공통적으로 모이는 의견은 ‘능력만 있으면 왕이 알아준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후 세도정치기에 비해 발언의 자유가 허용됐던 만큼 다양한 학문과 문화예술이 등장했다. 안 교수는 “정조 사후 세도정치 시대는 사상통제가 심하게 이뤄져 보다 많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18세기라는 역사무대의 가능성
18세기 조선은 현대 대중문화에게 다양한 소재와 뜨거운 쟁점이 살아있는 시기다. 특히 정조는 개인적인 삶과 군주로써의 정치적 역량이 맞물려 많은 이야깃거리를 쏟아낸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사료들도 그에 대한 많은 해석을 가능케 한다. 학계에서도 정조와 18세기 조선을 연구한 다양한 학술서가 쏟아져 나왔다. 박광용 가톨릭대 교수(국사학과)는 영조와 정조 시대 개혁의 참모습과 역사적 지혜를 알리는 취지에서 『영조와 정조의 나라』(푸른역사, 1998)를 출간했다. 박 교수의 책은 오늘날 정치 상황을 비춰 볼 좋은 사례로 18세기 영·정조의 탕평정치를 다룬다. 진정한 사회적 통합은 지역주의와 문벌의식의 결합을 깨뜨릴 때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주된 관점이다.


정조 시대를 개혁과 통합의 두 측면으로 나눴던 박현모 교수는 책략가이자 무장한 예언가로서의 정조를 그린 『정치가 정조』(푸른역사, 2007)를 내놨다. 정조의 개혁 추진 방식과 정조가 이루려 한 정치적 이상과 한계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담았다.
비단 정조에 머무르지 않고 18세기 조선을 다룬 학술서도 있다. 한국18세기학회는 『위대한 백년 18세기』(태학사, 2007)를 통해 18세기란 갈림길에서 동아시아와 서양 여러 나라의 변화를 짚었다. 18세기 이후 서양이 세계의 헤게모니를 쥔 강국으로 떠오른 반면 조선과 중국, 일본이 선택한 길은 무엇인지 만날 수 있다.


역사학회(회장 윤병남) 또한 지난 2011년 12월 ‘역사로 본 18세기’를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의 결실로 『정조와 18세기』(푸른역사, 2013)를 출간했다. 당시 조선에 일었던 탈중화론, 진경문화, 실학과 같은 문화적 흐름과 더불어 조선의 18세기가 청과 일본, 국제사회와는 어떻게 달랐는지를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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