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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피로해 질 때
언어가 피로해 질 때
  • 교수신문
  • 승인 2014.04.23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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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논어』 「공야장」에 따르면 공자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宰予는 어느 날 낮잠이 들었다. 이 모습을 목격한 공자는 “썩은 나무는 조각을 할 수 없고, 거름흙으로 쌓은 담장은 흙손질을 할 수 없다”고 강하게 꾸짖는다. 아예 포기했다는 어투다. 이걸로도 부족했는지 공자는 다음 말을 덧붙인다.


즉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의 행실도 그러할 것이라고 믿었었는데, 이제는 남의 말을 듣고 말한 대로 행동했는지를 살펴본 뒤에야 그의 말을 믿겠다는 것이다. 말하는 것이 행동하는 것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공자가 그 때 처음 알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자만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돈을 갚겠다고 말하는 행동이 결코 돈을 갚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에 주의하라고 충고했다. 또 조지프 르두는 “올바른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아는 것’으로부터 항상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언어와 행동 사이의 이 유명한 불일치가 야기하는 긴장 관계에 대한 담론은 知行論이라고 불리는 동양철학의 한 영역에서 줄기차게 검토돼 왔다. 언어에 대한 믿음 혹은 의심을 증거하거나 반박하는 것으로서 행동의 가치에 대한 인정은 언어와 행위 사이에 일련의 연쇄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그래서 우리는 말의 의미가 행동에서 관찰되리라는 것을 순순히 수긍하는 것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행동과 말의 유통을 가속화시키는 두 가지 주요한 통로다. 이런 점에서 SNS는 언어의 KTX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양자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초고속열차의 객차는 늘 종착지에서 완전히 자신을 비운 후에 다시 새로운 탑승객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SNS는 일단 탑승을 하고 나면 하차하기가 어렵다는 난점을 갖는다. 언어는 계속 네트워크를 떠돈다.


이렇게 언어가 부유하는 동안 행동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호소력 있는 언어는 때로 광범위한 호응 속에서 집단적인 행동을 추동하기도 한다. 반면에 지속적으로 유동성이 증가되면서 축적되는 언어들은 바로 그 성격 때문에 전통적으로 가정된 행동으로의 전이를 후퇴시킨다. 나아가 아예 행동을 전제로 하지 않는 언어들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종류의 언어가 늘어난다. 자꾸만 행동은 뒤로 말린다. 언어에 언어가 대응한다. 언어는 행동에 강제력을 부여하지 않으려 할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유희적 성격 속으로 침잠한다. 개죽이와 싱아형을 지나 ‘멘붕’과 ‘헐’의 시대를 거쳐 ‘웃대’와 ‘일베’를 오가면서 우리는 행동을 유예한 채로 피로한 언어의 과잉된 유동성에 직면한다. 한 마디로 언어의 과잉은 우리가 애초에 말하는 동물이 아니라, 움직이는 동물이었다는 점을 잊게 만든다. 언어들의 의미를 평가하는 관찰된 행동에 대한 요구도 약화시킨다. 심지어 公約이 空約으로 바뀌는 것은 정치의 상식이 된지 오래다.


그래서 행동을 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행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네트워크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 속에 축적될 뿐이다. 공간 속의 축적이야 가시적이라지만 시간 속에 축적된 행동들은 어떤가.
『장자』는 「소요유」의 첫 장에서 큰 행동과 작은 행동의 차이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3천 리나 되는 파도를 타고 9만 리를 오른 다음에 남쪽 바다로 날아가는 것이 鵬의 큰 비행이다. 매미와 비둘기는 기껏해야 나무 꼭대기에나 오르는 자신들의 작은 비행을 근거로 그 터무니없는 규모를 비웃는다. 두 비행이 모두 일어났다고 한들 그들이 지나간 하늘에는 티끌 한 점 남지 않는다. 시간 속의 행위는 대부분 이런 것이다. 그렇다고 큰 것과 작은 것의 구별이 그렇게 무의미한 것일까. 9만 리를 9억만 리와 비교하면 보잘 것 없겠지만, 9리와 비교하면 여전히 그것의 큼은 의미를 갖는다.

작은 것을 보다 작은 것과 비교하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작다고 말할 만한 큰 기준들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수많은 행동들의 누적된 결과들이 아마도 개인의 삶과 사회의 양상을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이러한 양상으로 만들고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9만리 창천을 향해 날아오를 것이고, 누군가는 여전히 잡목의 끄트머리에서 노닐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장자와는 다르다. 나는 그 큰 행위들의 목격자이고 싶다. 내가 그것들을 보았을 때 적어도 그것들의 크고 작음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싶다. 그리고 언어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에서의 난점이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던 소심함을 유지하고 싶다.

이향준 전남대 BK21박사후연구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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