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22:20 (목)
추문과 외풍에 흔들린 大學街 … 교수사회도 ‘빈익빈 부익부’ 시대로
추문과 외풍에 흔들린 大學街 … 교수사회도 ‘빈익빈 부익부’ 시대로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04.23 16: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_ 2000년대를 보면, 오늘의 대학이 보인다

최근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교수신문>과의 인터뷰 자리에서 “지금 한국 대학에는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 오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정보를 접하고 있는 그가 ‘쓰나미’라는 표현법을 쓴 것은 그만큼 사안의 심각성을 절감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렇다. 지금 한국 대학가에는 거대한 풍랑이 몰아치고 있다. 지역에 위치한 지방대들이 가장 먼저 이 바람을 맞고 있지만, 수도권 대학들이라고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찻잔 속의 태풍이랄까. 대학 구조조정, 구조개혁 논의가 번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학령인구 감소라는 외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지만, 대학 교육의 질적 제고라는 측면도 구조개혁을 유인한다.

<교수신문>은 창간22주년을 맞아 한국 대학의 변화를 시간을 거슬러 짚어보고자 한다. <교수신문>이 창간되던 1992년에서 2014년까지의 시간 축에 새겨진 대학·교수사회의 변화 양상을 통해 오늘 한국 대학이 직면한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지혜를 성찰해보기 위함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가 지금 2014년 한국 대학의 지형도 전체를 잉태한 시간대였다. 누군가가 말했다.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고. 한국 대학이 자신의 전통에서 긍정적인 유산을 자양분 삼아 더욱 도약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과거의 부정적 산물을 이어간다면 이는 한국 사회 전체에도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지난 728호의 1990년대 리뷰에 이어 2000~2009년 한국 대학사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짚어본다.

<교수신문> 728호에서 살펴봤듯, 1990년대 대학가를 강타한 바람은 크게 두 곳에 불어왔지만 그것은 중첩되는 것이기도 했다. 외인으로서 구조조정에 대한 압박이었고, 내인으로서는 다양한 교수업적평가 노력이었다. 2000년대 특히 2000년에서 2013년까지의 기간은 이 두 가지 요인들이 뒤섞이면서 대학과 교수사회 전체를 강박한 시간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2000년은 무엇보다 교수들이 주축이 된 ‘교수노조’, ‘전국대학교수회’ 건설을 추진한 해로 인상이 깊다. <교수신문> 제193호(2000년 12월 18일)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올 한해를 통틀어 교수사회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흐름은 ‘교수노조’와 ‘전국대학교수회’ 등 전국적 교수조직을 설립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정부의 거듭되는 일방적인 교육개혁 정책과 2002년 계약제임용과 연봉제의 전면 도입이 임박한 가운데 쟁점으로 떠오른 두 기구의 설립은 현장을 담아내지 못하는 개혁정책을 바로잡고, 추락하는 교수의 지위를 재정립할 수 있는 대안적 채널로서 모색됐다.” 이러한 노력은 2001년 2월 전국대학교수회(회장 황한식 부산대 교수) 설립, 11월 전국교수노동조합(위원장 황상익 서울대 교수) 설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대학개혁의 주체가 될 교수들이 대상화되는 기형적 개혁정책이 부른 결과였다.


1990년대의 구조조정 바람은 2000년 국립대를 겨냥했다. 국립대도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대상이라는 생각의 틀을 가시화됐다. 2000년 7월 교육부가 내놓은 ‘국립대 발전계획안’은 길고 지루한 ‘계획안’으로 비집고 들었다. “국립대 교수들을 개혁의 대상으로 보고 마련된 ‘총장직선제폐지’, ‘교육부가 주관한 총장 공모제 실시’, ‘업적평가제’, ‘성과급제 강화’ 등의 내용은 대학을 기업적인 시각에서, 교육을 통제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어김없이 ‘단골메뉴’로 만지작거렸고, 그 실행에 역점을 두고 있는 지방대 육성대책도 2000년 밑그림이 그려졌다. 교육부가 구성한 ‘지방대학육성대책위원회(위원장 박찬석 경북대 총장)’는 전국 대학들의 의견을 수렴해 ‘지방대학육성특별법’ 제정과 지역대학들의 통폐합을 골자로 한 대책안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해 ‘국립 서울대’는 개교 이래 처음으로 국정감사를 맞아야 했다.

2001년 전국교수회, 교수노조가 닻을 올렸지만, 2002년 1월 벽두부터 국립대는 새로운 변화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1월 1일부터 국립대가 ‘계약·연봉제’에 적용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 강사노조는 ‘한국비정규직교수노조’로 개편하면서 진용을 가다듬었다. 서울대, 고려대 총장을 둘러싼 대학가의 반응도 뜨거웠다. 판공비·사외이사 논란 속에서 이기준 서울대 총장이 사직서를 제출한 것은 5월이었다. 고려대 교수 1백 명이 ‘김정배 총장 연임 반대’ 침묵시위에 나선 것도 같은 5월이었다. 결국 김정배 총장은 6월 12일 총장직에서 사퇴했고, 고려대는 총장직무대리 체제를 선택했다. 교수단체들은 ‘대학의 공공성 쟁취와 연봉제 철회를 위한 전국교수대회’를 개최했다.


2002년 8월 교육부는 기초학문 연구에 7백억 규모의 지원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기초학문이 표류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9월 이화여대에서는 교수협의회가 창립됐다. 10월에는 김동애 전 한성대 대우교수가 ‘대학강사의 법적 지위 보장하라’면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그의 단식농성은 비록 형태는 바뀌었지만, 2014년 4월 현재까지 ‘천막농성’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대학강사 지위에 하등 변화가 없다는 문제의식이었다. 11월 22일 인권위가 교수공채 응시 연령 제한 시정 권고를 주문했던 것도 인상적이다.


국민의 정부에서 참여정부로 넘어오면서 2003년은 매우 독특한 모양새를 보여줬다. <교수신문> 2003년 12월 22일자(297호)는 이렇게 기록했다. “2003년은 교수들의 정치 참여가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 해였다. 노무현 정부를 ‘교수 참여 정부’라 표현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다.” 윤덕홍 부총리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대구대), 운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서울대), 박호군 과학기술부장관(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한예종), 권기홍노동부 장관(영남대) 등 대학에 몸담고 있는 교수들을 정부부처와 각종 위원회에 적극 기용했던 것.


2003년 2월 27일 윤병만 전 아주대 교수의 헌법소원 결정은 극적인 사건이었다. 재임용제가 헌법불합치한다는 그의 헌법소원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구사립학교법 제 53조의2 제3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1984년부터 시작한 한 해직교수의 20년간의 법정 투쟁이 교수재임용제라는 두터운 아성을 깨뜨린 셈이었다. 헌법재판소가 ‘재임용제에 사전 사후 구제절차 규정이 없다’라며 교육부에 입법개선을 권고자하 곧 재임용제 개선, 해직교수 소급 구제 등이 중점적으로 논의됐다.” 교수들을 신분 불안으로 몰고 갔던 전시대의 낡은 유물 하나가 이렇게 한 교수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청산된 순간이었다.

대학 구조조정 시작되다
2003년의 가장 뜨거운 예고 화두는 ‘교육시장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의 모든 것을 농축했다고도 볼 수 있는 교육시장 개방에 대해 교수사회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박거용 상명대 교수가 상임대표를 맡은 ‘WTO 교육개방 저지를 위한 공동투쟁본부’가 꾸려졌고, 이들은 “교육은 개방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청와대 앞 시위 등을 통해 대대적으로 교육개방 양허안 제출을 반대했다. 그러나 정부는 3월 31일 WTO도하개발아젠다(DDA) 서비스 협상에 최초 양허안을 제출했다. 교육부문 양허안을 제출한 나라는 5개국에 불과했다.


이 시기 인문학 위기 담론과 함께 ‘이공계 기피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가시화됐다. “2003년에는 이공계를 살리기 위해 2백여 명의 전국 이공계 단과대학 학장들이 모이는 이례적인 사건도 있었다. 지난 달 26일에는 방재욱 충남대 자연대학장, 이만형 부산대 공과대학장, 양승열 순천대 농업생명과학대학장 등이 공동대표인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공계 대학장 비상대책협의회’가 기자회견을 열어,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공계를 살리기 위한 대책들을 건의했다.” 그러나 대학에 번진 이공계 기피 현상은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과대나 고시 쪽으로 이공계 두뇌가 쏠리는 파행을 극복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한 국립대 공대 교수는 이런 현상을 놓고, “솔직히 말해 이공계가 한국사회를 먹여 살렸는데, 지금 와서는 그런 이공계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이공계를 선택할 수 있겠냐”면서 볼멘소리를 던졌다. 그러나 2003년 최대 피해자는 지방대였다. “지방대에 있어서 2003년은 가혹한 해였다. 대학 M&A 방안이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구조조정의 칼바람에 많은 교수들의 급여가 깎여나갔으며, 압박감에 못이겨 떠나는 교수들도 생겨났다. 이틈에 나타난, 광주·전남지역의 국립대 연합은 구조조정의 한 모델을 제시한 것이었다. 김웅배 목포대 총장, 오병주 목포해양대 총장, 김재기 순천대 총장, 김하준 여수대 총장, 정석종 전남대 총장 등은 지난 6월 25일 ‘광주 전남지역 국립대 연합대학’에 관해 전격적으로 합의했다.” 인적 물적 교류에서부터 장기적으로는 통합까지 염두에 둔 국립대 합종연횡이었던 셈이다. 오늘의 전남대, 경북대, 강원대, 부경대 등 국립대들이 이런 ‘통합’ 속에서 탄생했다.


2004년 새해 시작과 함께 발표된 교육인적자원부의 ‘선택과 집중’ 정책은 대학사회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용어에는 애덤 스미스의 그림자가 스며들어 있다. 문제는, 이 ‘선택과 집중’이 대학, 즉 교육-학문공동체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 있다. 누리사업과 수도권대학 특성화사업 등 교육부의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 대학들은 2004년을 발바닥 땀나게 뛰어야 했다. 선정 결과에 따라 희비가 갈리는 풍경도 연출됐다. 대학구조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됐던 국립대 통합은 지역별로 우후죽순 통합을 선언하는 상태로 접어들었다. 사립학교법 개정을 둘러싸고 찬반입장이 팽팽치 갈리고, 고교등급제 논란 등으로 대학은 뒤숭숭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처우개선 문제로 시간강사들은 파업을 선언했다.
이 가운데 2004년 대학을 더욱 뜨겁게 달군 것은 ‘로스쿨 유치’ 문제였다. 저마다 자기 대학에 로스쿨을 유치하기 위해 물밑 발길이 분주했던 해였다. “사법개혁위원회가 내년까지 대학을 선정하고 2008년부터 설립, 매년 1천2백 명의 법률전문가를 양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대학마다 로스쿨 유치가 관건이 된 것. 몇몇 대학은 법대 교수를 충원하고 신입생을 뽑지 않는 등 나름의 준비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애초 사법개혁 차원에서 논의됐던 로스쿨 도입이 소수의 전문인재 양성으로 가닥을 잡자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사립학교법’이 폭탄이 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2004년 10월 종요기 한국사학법인연합회장은 “사립학교법이 개정되면 자진해서 학교를 폐쇄하겠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 그의 발언은 사립학교법 개정 논란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개방형 이사제 도입 △친인척 이사수 4분의 1 이내로 제한 △대학평의원회에 예결산 심의권 부여 등을 골자로 한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국회 교육위에 상정됐지만, 개정 반대-찬성 입장만 팽팽치 맞선 한 해였다.


그러나 진짜 폭탄은 2004년 12월 28일 확정된 교육부 대학구조개혁방안이었다. 한 해의 마지막 며칠을 남겨둔 상태에서 제시된 이 ‘대학구조개혁방안’은 가깝게는 2005년을, 그리고 결과적으로 오늘날까지 영향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게 된다. 2005년은 그렇게 시작됐다. ‘국립대’를 중심으로 대학구조개혁이 본격화된 2005년, 국립대 교수 1천여 명이 이 정책을 비판하면서 거리 시위에 나선 것도 주목할 사건이었다. 같은 시기 사립대는 연차별 전임교원확보율을 맞추느라 교수임용에 나섰다. 그러나 열악한 재정현실에서 교수 신분불안을 초래할 수 있는 비정년트랙 전임교원 임용도 남발돼 교수사회의 비정규직화 현상을 심화시켰다. 당연히 이 사안은 학문후속세대들의 눈총을 살 수밖에 없었다. 큰 폭의 교수임용이 진행되면서, 그간 쉬쉬하던 교수임용 비리, 불공정 임용 사례, 이 과정에서 논문 표절 등 교수사회의 도덕성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어느 해보다 진지한 교수사회 자성 목소리가 제기된 것도 이 때문이다. 교수업적평가 기준이 강화되면서 ‘철밥통’ 시대도 저물어가기 시작했다.


<교수신문> 제383호는 이렇게 기록했다. “계약제 도입 4년째를 맞이한 교수사회의 ‘철밥통’ 시대도 끝났다. 지난 2002년 계약임용제가 시작되면서 정년보장은 사실상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이 현실로 나타난 것. 각 대학마다 교수업적평가기준을 한층 강화하면서 연구경쟁력 제고에 나섰다. 승진·승급심사도 강화되면서 직급정년이 도입돼 일정 기준을 채우지 못하고 대학을 떠나는 교수들도 하나둘씩 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교수 연구력을 높이는 방안 모색이라든가, 업적이 우수한 교수에게 미리 정년보장을 해주고 집중 지원하는 ‘스타교수’ 육성도 두드러졌다. 드디어 교수사회가 ‘빈익빈 부익부’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 결과 학문의 자율성이 위기를 맞았다는 비판과 우려가 제기됐다. 2006년은 2005년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한 해였다. 특히 교수사회의 도덕성 문제가 홍역을 앓았다. 표절이라는 잘못된 관행에 대한 자성은 2005년 연말에 터진 황우석 서울대 교수 사태와 김병준 전 부총리의 논문의혹으로 인한 낙마 등과 겹쳐 혹독하게 이어졌다. 대학 등록금 갈등도 첨예화된 해였다. “국회에서도 등록금 관련 법안이 쏟아졌다. ‘대학 선 무상교육제’, ‘가계수지연동 대학등록금 상한제’, ‘등록금 부담 절반 줄이기’ 등이 제안됐다.” 요 몇 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반값 등록금’의 전사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학력위조·논문표절, 가짜와의 싸움
역시 사건은 ‘추문’과 함께 춤을 춘다. ‘신정아 파문’을 시작으로 학력위조, 가짜 박사학위 문제가 불거진 2007년이었다. 모처럼 대학가에는 ‘자율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大選의 해였기 때문. 이 자율화 바람에 편승해 서울지역 주요 사립대는 교육 3不정책을 폐지하라는 목소리를 냈다. 로스쿨 도입을 둘러싼 진통도 계속됐다. 2006년의 표절 논란은 2007년 교육부총리, 총장 등 사회 저명인사의 논문표절 의혹으로까지 번졌다. 학계에서는 연구윤리를 재정립하자는 목소리가 제기됐다. 2007년 12월 24일자 <교수신문>에 따르면 “교육부는 대학 및 학회를 대상으로 연구윤리 헌장, 연구윤리 규정을 정비하도록 유도·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학술진흥재단은 지난 7월부터 학술지 관리지침을 시행해 논문 표절, 중복 게재 등이 확인될 경우 논문투고자의 논문투고를 최소 3년 이상 금지하는 한편 학회는 3년간 학술지 지원을 받을 수 없도록 규정했다.”


자신의 소송에 패소 판결을 내린 담당 판사에게 석궁을 쏴 새해 초부터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 사건도 이 해 발생했다. 교수단체는 ‘김명호 교수 구명과 부당해직교수 복직 및 법원과 대학개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조직해 김 전 교수 구명운동과 복직활동에 나섰다. 김명호 교수의 이른바 ‘석궁 사건’은 이후 영화로 만들어져 세간을 뜨겁게 만들기도 했다. 그의 행위를 놓고 ‘정의의 문제’를 다시 고민해보자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2008년은 1998년의 복사판이었을까. 1998년 IMF로 경제위기의 파도를 만난 지 10년이 지난 2008년, 미국발 글로벌경제 위기가 한국 대학가를 흔들었다. 그러나 모양새는 10년 전과 달랐다.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波高에 휩쓸렸던 1998년과 달리, 2008년 대학들은 경기침체 장기화에 대비해 등록금과 교직원 인건비를 동결하는 등 발빠른 대응에 나섰다.

<교수신문> 김유정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등록금 동결, 신규 사업 축소 등 위기극복 방안은 10년 전과 비슷하지만, 대학 구조와 운영방식은 많이 달라졌다. IMF를 극복하기 위해 몸집 줄이기에 나선 뒤 다시 한번 불어 닥친 경제위기 앞에 대학들은 또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서강대, 서울대, 한국외대 등 20여개 대학은 등록금 동결을 잇따라 선언했다. 위기극복 프로젝트도 가동됐다.

성균관대는 등록금 동결을 발표하면서 구성원이 동참하는 위기극복프로그램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교수임용도 축소됐다. “한 차례 위기를 겪은 이후 체질 개선에 돌입한 대학은 예전만큼 큰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행정 효율성을 지향하면서 수도권 소재 사립대를 중심으로 기업 경영체제를 도입, 조직을 팀제로 바꾸는 등의 행정개편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0년의 악몽의 그림자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대학들이 겪었던 어려움을 또 겪을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불안감이 대학가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것이 2008년의 일이었다.

소띠 해였던 2009년. 소처럼 우직하게 그러나 정직하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간 대학사회였을까. 그러나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바람이 엄습했던 대학가의 체감 온도는 높아지지 않았다. 전국 166개 4년제 대학들이 등록금 동결을 선택했다. 이 시기 연세대는 학부제에서 방향을 틀어 다시 ‘학과제’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3월 개학 무렵이었다.

포스텍은 마침내 정년보장 교수들도 평가하겠다는 비장의 카드를 뽑아들었다. 교과부는 시간강사에게도 4대 보험을 보장하는 처우개선 방안을 발표했지만, 김동애 대우교수의 천막농성은 멈추지 않았다. 2009년 6월, 한국학술진흥재단은 ‘한국연구재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출범했다.

 인문사회와 자연과학 분야까지 아울러 지원하는 몸집이 불거진 연구재단 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7월 한나라당은 집권여당의 힘을 지렛대 삼아 ‘사학법’ 폐지를 공론화했다. 11월에는 사립대총장협의회가 사학법 폐지 건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이해 12월 서울대 법인화법은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2009년이 그렇게 저물어 갔다. 역사의 전망을 탁류 속에 던져놓은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