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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꽁트] 무보직 교수협의회 의장
[신년꽁트] 무보직 교수협의회 의장
  • 교수신문
  • 승인 2001.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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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1-02 16:46:09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金교수는 대학내에 또 하나의 조직이 생기는 것을 진심으로 원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대학의 국회격인 평의원회도 있었고 또 예로부터 존재해온 대학교수협의회도 있었다. 평의원회가 대학 당국 즉 총장, 사무국장으로부터 주요 업무에 대해 형식적으로나마 보고를 받고 있었고 또 요식적으로나마 대학 당국의 인사에도 인준을 해주는 것으로 그 업무를 시행하고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대학교수협의회는 그냥 옛날에 만들어 놓은 것은 어쩔 수 없다하여 존재하고 있었으나 그저 일년에 한번 정기총회하고 퇴임하는 교수에게 선물이나 보내는 것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김교수가 속해 있는 00대학만 하더라도 이미 前학장이 몇 명 있고 한 학장에 5,6명의 보직교수가 있었으므로 다 합해 보면 90여명의 교수들 가운데 30여명 정도가 이미 보직을 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봐야 했다. 그런데 무보직교수협의회를 또 만든다니….
‘알 수 없는 일이군요, 이미 많은 교수들이 대학 행정에 참여하고 있고 소위 보직 교수를 하고 있는데 무보직교수협의회를 만든다니 이게 뭐 애들 장난도 아니고 말입니다.’김교수는 설명을 하러온 崔교수에게 그렇게 말했다. 최교수는 평소 교수회의에서도 엉뚱한 말을 해서 사람들을 웃기는 발언을 자주 해온 사람이었다.
‘우리대학교 내에서도 보세요, 교수라고는 아홉명 있는 대학에서 학장있죠, 부학장있죠, 동물농장농장장, 식물농장농장장, 평의회의원 둘, 그렇게 보직을 해야 되는 대학도 있어요, 그러니 어떻겠어요, 아무런 보직도 하지 못하는 교수는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 트러블메이커 그렇게 생각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전체 교수 8백명 가운데서 아무 보직도 못하는 사람이 4백명쯤되니까 거기서도 힘을 모아서 뭔가 얘기할 거 있으면 하구 그래야 되지 않겠어요?’‘글쎄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게 밖으로 나가면 사람들이 웃지 않을까요?’‘그렇지 않습니다. 보직에 참여하지 않은 순수한 교수들이 모인 것이니까 오히려 신선하고 또 영향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김교수는 그냥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그럴 만하다고 고개가 끄떡여졌던 것이다. 보직교수를 어떤 교수가 ‘직’자에 ‘ ’만 빼고 발음하면 아주 근사하다고 해서 웃은 적이 언제였더라… 하는 기억 때문이었다.
김교수는 그 대학교하고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00대학교의 교수 분포도를 보면 전국 어느 대학교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출신고등학교 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교가 다 그러하다. 지역별로 내려가면 더 심하고 서울로 올라가면 좀 덜할 뿐 제 일차는 어느 고등학교 출신이냐, 그 다음이 어느 대학 출신이냐로 따지게 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지방색을 타파하자!’라고 정치권에서 아무리 주장을 해도 마찬가지다.그 다음으로 S대냐, 모교냐, 그것이 둘째가 된다. 그것을 地緣과 學緣이라고 한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대학 총장선거 자율화 이후 총장이 될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은 그 지연과 학연이 맞아야 된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血緣까지 칙칙하게 얽혀 있어서 총장 후보인 어느 누구는 어떤 대학의 누구와 사촌이고 또 누구와는 처남매부간이고 또 누구와는 사촌지간이며… 그렇게 따지고 따지고 또 따져서 후보가 되고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지연도 없고, 따라서 혈연이 존재하지 않으며 학연 또한 없는 김교수로서는 그저 소 닭 보듯 개 머루 보듯 토끼 빵 보듯이 지난 30년 세월 그 대학의 교수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책상 위에 있는 대학 신문을 잠시 들여다보던 김교수는 ‘무보직 교수 협의회 탄생할 것인가?’라는 제하의 글이 난 것을 보게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반대’론자로는 그 대학에서 글 잘 쓰기로 소문난, 그러나 또한 언제나 칼 쥔자의 편에서서 필봉을 휘두르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논지는 ‘옥상옥’이었다. 대학교 내에 수많은 조직이 있는데 그것도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면서 또 다른 조직을 만들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찬성’론자로는 전에 만났던 최교수였다. 그는 대학의 행정을 ‘삼권분립’ 체제로 보면서 요컨대 건전한 비판을 건전하게 해줄 장치가 없다는 점을 들어서 ‘무보직교수협의회’ 탄생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다. 그는 그 협의회가 탄생하여 나아갈 길로 비정부기구의 예를 주로 들고 있었다. 그래야만 대학이 바른길로 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김교수는 몇몇 교수들의 방문을 받았다. 내용인즉슨 앞으로 며칠 뒤에 무보직교수협의회를 탄생시킬 계획인데 거기 회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김교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30년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학과장을 빼놓고는 한번도 보직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 것을 할 사람이 따로 있는데…. 김교수는 완곡히 거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의 말인즉슨 무보직교수협의회 의장이야 말로 김교수가 적격이라는 것이었다. 우선 타교 출신에다가 타지역 출신에다가 평생 보직 한번 해보지 않았으니 그런 점이야말로 후학들에게 좋은 본보기 감이라는 얘기였다.
김교수는 참으로 고뇌아닌 번민을 해야했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평생 보직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와서 이런 청이 들어오다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비정부기구의 이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쪽에서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고 있는 교수들의 면면도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름답게 늙기 위하여 살아온 자신의 대학교수 생활도 떠올리게 되었다.
며칠후 김교수는 총장의 부름을 받았다.
‘아무래도 김교수께서 도서관장직을 맡아 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아울러 비보직교수 협의회라는 것에 대해서 저도 생각을 해봤읍니다만 우리 한국에는 없는 제도고 따라서 우리 대학에서 그런 일을 먼저 해야 하느냐 하는 생각에서….’비보직교수협의회는 문교부의 유권해석으로 없었던 일로 되었다. 세상에 그런 조직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뒤 김교수는 도서관장으로, 최교수는 저 멀리 바닷가 끝에 있는 대학 수련원장으로 발령받게 됐다.

박양호/소설가·전남대

□약력: 1948년 홍천 출생. 전북대 문학박사. 1974년 ‘현대문학’으로 데뷔. 『벼락크럽』 『늑대』 등 작품집 다수. 1980년부터 전남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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