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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서평]수전 손택의『해석에 반대한다』(이민아 역, 이후刊)
[쟁점서평]수전 손택의『해석에 반대한다』(이민아 역, 이후刊)
  • 정정호 중앙대
  • 승인 2002.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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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으로서의 예술 존재론
정정호 / 중앙대·영문학

1966년에 나온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5~)의 ‘해석에 반대한다’가 36년이 지나 국내에서 번역 출간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60년대와 70년대 손택이 열정적으로 논의했던 주제들이 새 천년이 시작된 이제야 우리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단 말인가. 새로운 대중문화예술비평가로 현대문화와 예술에 대한 논의의 정확성과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손택에 대한 응분의 관심을 갖지 못했다. 만시지탄의 감은 드나 지금이라도 탈근대 시대의 ‘새로운 감수성’을 주장한 손택이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된 것은 다행이다.

텍스트는 독자와 함께 만들어가는 놀이터

손택은 실로 다재다능한 작가 비평가다. 소설가로서 ‘은인’(1963)을 비롯해 6권의 소설을 썼고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1969) 외에 사진, 영화 등에 관한 것을 포함해서 7권의 비평적 에세이집을 냈으며 여러 편의 희곡을 쓰고 직접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다. 명민한 비전적 지성으로 현대문화의 혼돈을 감식한 손택은 그 첫 평론집인 이 책에서 아직도 유효하고 흥미로운 반해석론, 스타일, 해프닝, 캠프론, 새로운 감수성 등에 관해 논한다. 이 책은 손택의 “끊임없이 변화해온 나의 감수성을 보여주는 사례연구”들이며 “예술작품의 등급을 매기는” 일보다 “흥미로운 의문들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의 견해는 정확하고 독창적이다.

이 책의 제목으로 삼은 첫 번째 글에서 손택은 해석(interpretation)을 반대한다. 내용 속에 깊이 숨어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반동적이고 보수적인 해석 작업이 예술이나 문학자체를 고갈시키고 예술의 특수성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손택은 해석 작업이 도시의 매연처럼 “우리의 감성에 해독”을 끼치고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라고까지 매도한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투명성의 경험 즉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이라고 주창한다. 이래야만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으로서 감성을 회복할 수 있다. 손택의 유명한 결론.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다.”

내용보다 ‘스타일’을 강조하는 손택은 ‘스타일에 대해’라는 글에서 “스타일이 곧 예술”이라고 선언한다. “예술이 의지가 스스로를 갖고 노는 최상의 놀이라면, 스타일은 이 글이 운영하는 규칙이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의 특징은 개념적 지식내용의 창출이 아니라 “매혹된 상태에서 우리가 흥분, 참여, 판단에 연루”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유혹이지 강간이 아니다.” 손택은 엄숙한 학문적 담론인 학술논문보다는 경쾌하고 탄력적인 짧은 에세이 형식을 택한다. 그의 비평 텍스트는 우리를 유혹하는 일종의 즐거운 텍스트이다. 손택이 롤랑바르트에 열광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 텍스트는 의미를 풀어내는 해석의 장(읽는 텍스트)이 아니라 독자와 함께 만들어 가는 놀이터(쓰는 텍스트)이다.

충격으로서의 예술 존재론

‘‘캠프’에 관한 단상’은 가장 유명한 에세이다. 현대의 대중문화시대에 멋쟁이로 즐길 수 있는 잡종적 감수성이며 분명히 아방가르드적인 캠프 취향은 초기 포스트모더니즘이론 형성에도 일조를 하였다. 니체의 냄새가 나는 파격적인 단상형식으로 된 이 에세이는 오스카 와일드의 향기까지 배어있다. ‘캠프적 감수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절제한 기질이며 과장, 공상, 열정, 순진함 등이 적절하게 혼합된 것”이고 “감동적이며 재미”있으며 “탐미적”이며 “다정다감한 감정”이다. 캠프 취향의 이러한 잡종성은 향후 손택의 반(反)미학의 토대가 된다.

마지막 에세이에서 손택은 “하나의 문화와 새로운 감수성”을 내세운다. 손택은 우선 C. P. 스노우가 시작한 인문문화와 과학문화라는 “두개의 문화”의 갈등 문제를 전면 거부하고 두 개의 문화는 합해지고 상보적인 하나의 문화가 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무엇보다도 애석한 것은 “자동화된 과학사회에서 예술은 기능적이지 못하며 쓸모도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 인문학자들의 예술가 자신들의 패배의식을 질타한다. 하나의 문화 속에서 “새로운 감수성의 탄생”이 선언된다. 과학문화와 인문문화 사이의 통념적인 모든 경계선―예술과 비예술, 형식과 내용,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등―은 해체시킨다. 이제 인문학자들은 인문학과 과학을 가로 질러가는 새로운 이론을 창출해 탈주의 선을 마련해야 한다. 현대예술은 대량소비사회에서 우리의 감각을 놀라게 하는 충격요법으로, 감각의 마비를 퇴치하는 방식이다. 손택의 이러한 새로운 감수성은 일상생활에서의 역설적이고 아이러닉한 반미학의 전략이 아니겠는가.

유희적이고, 전복적이고 수행적인 예술 비평담론을 추구하는 손택의 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손택의 최근 사회운동가로서의 활동은 1988년에 국제펜클럽 년차 회의에 미국 펜클럽 회장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해 구속문인들의 석방을 촉구했으며, 1993년에는 전쟁중인 사라예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했고 9.11 테러사건에 대해서 미국 정부의 태도를 비판했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운동은 초기의 비평집에 나타난 저항과 위반의 문화정치학과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여전히 손택은 우리시대의 변화와 개혁을 실천하는 문학지식인이다. 탈근대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수전 손택의 현실참여는 캠프취향의 해프닝이라는 전복의 반미학, 그 정치적 환유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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