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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읽기] 사론집을 통해 엿본 두 원로사학자의 역사론
[비교읽기] 사론집을 통해 엿본 두 원로사학자의 역사론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2.10.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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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공존에 대한 그리움의 고백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강만길 지음, 창작과비평사 刊), 『그래도 역사의 힘을 믿는다』(조동걸 지음, 푸른역사 刊)

인류 진보의 기록이라는 역사의 관념은 죽었는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벤야민의 말은 여전히 유효한가. 기록된 역사와 역사를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의문시되는 시대다. 그렇다면 역사는 혼란만 주고, 그 효용성이 떨어지는 학문일까. 현상은 오히려 그 반대쪽이다. 역사를 기술하고, 출판하고, 소비하는 행위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도대체 역사는 무엇이며, 역사를 보는 올바른 관점은 또 무엇인가.

 
최근 출간된 두권의 사론집은 이런 고민들을 풀어볼 수 있는 넉넉한 장을 제공한다. 강만길 상지대 총장(사학)이 펴낸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와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사학)의 ‘그래도 역사의 힘을 믿는다’가 그것. 두 사람은 모두 1950년대 초반부터 역사연구를 시작해 50년 동안 한국근대사와 씨름해온 역사학계의 내로라하는 원로들이다. 이 두권의 책은 저자들이 정년퇴임 후 역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돈해서 내놓은 결과물. 당연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인류의 꿈이 실현되어 온 과정

가장 궁금한 것은 저자들의 역사에 대한 정의다. 그런데 경력상의 유사함과도 같이 역사를 바라보는 저자들의 관점은 상당히 일치한다. 강교수는 역사를 “인류사회의 이상을 현실화하는 과정”이라 말하고, 조교수는 역사가 “꿈과 그것의 실천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꿈(이상)을 실천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고, 역사란 그런 인간들의 삶을 기록한 것이라는 얘기다.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뻔한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한 느낌이 든다. 그게 전부인가. 좀더 읽어보자.

 
여기에서는 목적론적 세계관의 흔적이 감지된다. 강교수는 “개개인에게는 삶의 목적이 있고, 가정은 가훈이 있고, 좀더 큰 공동체도 지향해야 할 덕목이 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이 모여사는 가장 큰 공동체로서의 인류사회에도 바람직한 지향점이 있다”고 말한다. 조교수도 비슷한 말을 한다. “꿈이란 삶의 지혜요 설계이다. 인류역사는 역사 발전의 꿈, 현대로 말하면 자유 평등의 꿈에 합당한지를 가려서 (역사를) 계승해왔다”고 서술한다.

두 번째 공통점. 저자들은 역사의 주인공으로 ‘인류’를 상정한다. “인류사회 전체가 역사적으로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기는 불가능한가”(강), “멸망 위기를 맞은 인류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향을 제시하는 일, 즉 새로운 꿈을 만드는 일은 역사학의 몫이다”(조).

인류가 역사의 기본 서술단위이거나 잠정적인 단위로 상정될 경우, 그것은 거대서사이다. 또한 목적론적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진보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그렇다면 ‘아우슈비츠’나 ‘9?11 테러’ 같은 야만의 흔적은 무엇인가. 조교수는 그것이 “일시적인 반동”이며 “그런 반동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라고 설명한다. 어쨌든 저자들에게 역사의 방향이란 흙탕물을 튀기더라도 결국은 인류공존의 바다로 나아가는 일관된 흐름이다.

보편적인 것이 우세한 시대의 역사론

이런 확고한 믿음 속에는 음미할 것들이 많다. 역사가의 저러한 도덕적 의지가 생겨나는 원천은 어디인가 하는 질문이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책에 속 시원히 나오지 않는다. 다만 ‘평화’, ‘민주주의’, ‘평등’ 등의 단어에서 인본주의의 기본 가치에 대한 신뢰를 볼 수 있는 정도이다.

그리고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중요한 것이 빠진 것 같은 허전함이다. 역사가의 존재가 희미하다는 느낌에서 오는 이 허전함은 긴 여운을 남긴다. 저자들의 글에는 역사가의 국면, 역사가가 역사적 현실에 개입할 때 발생하는 욕망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다. 일종의 실존적인 동기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역사는 학문이고 학문은 과학이라는 전통에서 생겨난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인류의 역사를 쓰는 것으로 역사가 개인의 아이덴티티가 모두 해결된다고 믿기에는 부족한 무엇이 있다. 역사가가 자신의 욕망에 섬세하지 못할 때, 역사 속의 수많은 신비스러운 일들, 개개인의 중층적 캐릭터들이 온전히 그려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도 던져본다.

이런 류의 역사학에서 개별적인 것은 ‘고려’의 대상은 되지만, 결국 보편적인 것으로 수렴된다. 개별적인 것은 역사의 줄기가 되지 못하고, 역사의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나무와 풀잎일 뿐이다. 이런 인식이 씁쓸한 것은, 우리가 보편적인 것을 절대시하는 풍토 속에서 자라왔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저자들은 민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학문으로서 역사학이 출범한 시대의 세대다. 저자들의 50년 역사연구의 총화가 담긴 이 글들은, 사실은 그들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끈질긴 추구를 포기하면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짐작도 여기서 생겨난다. 민족이나 국가 단위의 역사에서는 명석한 해석자일지도 모르지만, 개인들의 작은 역사에서는 단순한 전달자에 머무르고 마는 현상도 그렇다. 개인주의의 발흥은 한국의 주류 역사학자들이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가 아닐까.

그런 느낌과는 상관없이, 저자들의 견해는 가슴을 울리는 데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역사와 역사학을 전망이 있는 학문으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비판을 위한 비판, 가치를 위한 가치는 아무래도 제자리를 맴도는 것이어서 답답하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방향타를 놓친 소모적인 항해가 얼마나 많은가. “희망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데서 생겨난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학문의 최종적 용도는 학문하는 자의 최우선 고려사항이라는 사실을 저자들은 잘 보여주고 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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