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22:15 (금)
우리시대의 자화상, 대학생의 책 읽기
우리시대의 자화상, 대학생의 책 읽기
  • 임영봉 서평위원/중앙대 교양학부대학·국문학
  • 승인 2014.04.14 18: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얼마 전, 학내 신문사 기자의 요청에 의해 대학생들의 독서 경향에 대한 인터뷰를 하게 됐다. 인터뷰를 앞두고 담당 학생 기자가 메일을 통해 자료 하나를 미리 보내왔는데 첨부된 파일을 열어보니 학교 중앙도서관에서 대출 회수를 기준으로 순위를 매긴 50여 권의 도서 목록이었다. 그 목록을 처음 보았을 때 조금 놀랐던 것은 소설류의 책들이 상위 10위 권을 거의 채우고 있었다는 점이었지만, 정작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순위의 1~2위를 다투고 있는 『빅 픽처』와 『종이 여자』라는 낯선 제목의 번역 소설이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 책들을 읽어보지 않았기에 내용이 궁금해 인터넷 검색을 했다. 그 두 권의 책은 유명한 베스트셀러 판타지 소설이었다.

10위권 밖의 순위 목록은 각양각색의 성격을 가진 다양한 분야의 도서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맨큐의 경제학』,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해커스 토익』, 『기적의 자소서』같은 경제 경영과 자기계발 류의 책들이었다. 대학 도서관에서 집계한 통계 자료가 보여주고 있는 요즘 대학생들의 독서 경향은 두 가지 성격의 책에 대한 편중으로 나타나고 있다. 판타지 소설로 대변되는 대중적 흥미와 심리적 위안을 제공하는 오락적 성격의 책과, 경제 경영과 자기계발이라는 현실적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실용적 성격의 책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 학생 기자와의 대화 과정은 필자에게 책의 가치와 읽기 행위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대학에서 나 자신이 담당해온 역할이 교양교육 분야에서 쓰기와 읽기에 관련된 공통 필수 교과목들의 교과 과정을 수립하고 운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여러 대학에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일 중의 하나는 독서 교육을 강화해 학생들이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읽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는 해외의 명문 대학들은 일찍이 읽기와 쓰기 교과 과정을 체계화하고 집중적인 교육을 해왔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국내의 여러 대학들이 학부 과정에 있는 대학생들에게 많은 책, 그것도 고전을 읽히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이상과 현실의 커다란 간극이 놓여있다. 대학들이 고전의 가치에 주목하고 읽기 교육의 필요성은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조건이나 환경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당면한 현실, 그러니까 대학 도서관의 대출 순위가 보여주고 있는 대학생들의 독서 경향부터 다시 한 번 찬찬히 곱씹어보는 일이다.

이번에 필자는 일반 성인들의 독서 실태에 대한 조사 결과를 찾아서 대학 도서관의 자료와 비교해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 전반적인 경향은 일치했다. 그러나 대학과 사회가 구별되는 경계 같은 것이 오래전에 사라져버렸다는 점을 다시 떠올려본다면 그 결과는 그렇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대학생들의 책 읽기가 언제부터 흥미와 실용서 중심으로 기울어졌는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날의 대학과 대학생이 사회와 기성 생활인을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파른 생존 경쟁의 현장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활인들에게 있어 책이란 지극히 명료한 실용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는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시대의 고전은 먼 곳에 있지 않다. 화장실 같은 곳에서도 볼 일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보면 바로 눈앞에서 동서양의 고전과 조우하게 된다.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라.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공자와 장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말씀들이 도처에 적혀있다. 거기에서 우리가 읽게 되는 몇 개의 문장들은 원텍스트에서 매우 정교하게 분리돼 본래의 맥락을 상실한 채 효율적인(!) 처세를 위한 교훈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고전마저도 그렇게 소비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실상을 말하자면,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고전 류의 의미 있는 책을 읽어낼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과 정신적 여유를 전혀 갖추고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책 읽기는 의무와 강제의 형식이 될 수밖에 없고, 그리하여 졸업할 때까지 몇 권의 책을 읽었다는 것을 인증해줌으로써 스펙을 채워주는 식의 고육지책이 학생들을 배려한 최선의 방안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단기적으로는 고전 읽기에 대한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홍보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겠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고전과 독서 행위 자체가 가진 가치와 의미를 왜곡하고 훼손시키는 결과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고전의 범주에 드는 좋은 책들을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읽어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독서 행위의 내밀한 세계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교육 과정을 초등학교 단계에서부터 체계화하고, 사회 전체가 새로운 삶의 가치를 수립해나가는 일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좋은 책이 널리 읽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하나의 질문, 경쟁과 속도, 효율성과 실용 따위와는 구별되는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로 족하다.

임영봉 서평위원/중앙대 교양학부대학·국문학
필자는 중앙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학사상>으로 평단에 나왔으며, 지은 책에는 『청년 김현과 한국문학』, 『한국 현대문학 비평사론』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