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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翔하는 솔개의 자태가 준 靈感 …새숭배사상의 사유세계가 실마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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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서예가
  • 승인 2014.04.07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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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 20_ 기와의 명칭과 와당 문양의 상징

▲ [그림6] 황룡사지 출토 치미, 높이182cm, 경주국립박물관.
고찰이나 고택의 지붕 위 이끼가 창연한 기와를 보면 오랜 세월 풍상을 견뎌온 품격에 경의를 느낀다. 고건축물의 질서와 조화는 지붕 위의 기와가 대단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고대사회에서 기와는 국가 권력의 상징인 도성의 조영에 우선적으로 활용된 건축부재다. 도읍의 위치를 선정하는 일부터 시작해, 각종 건물을 짓고 도성의 성벽을 쌓는 일련의 작업은 왕조의 통치 이념을 도성이라는 가시적 공간에 구현하는 과정이었다.”(정치영, 「백제 한성기 제와술의 시말」, 『百濟瓦塼』, 국립부여박물관, 2010, 334쪽)


위의 설명처럼 도읍지에 있는 권력자들의 건축물은 크고 높으며 지붕을 기와로 덮었다는 점이 특색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이 끝난 뒤 폐허가 된 도성엔 발에 밟히는 게 기와조각뿐이다. ‘瓦礫’이란 말이 그래서 생긴 말일 것이다. 유적 발굴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것도 바로 기와조각이다.


기와는 비와 햇볕을 가려주고 서까래가 썩는 것을 막기 위해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뛰어난 발명품 중의 하나다. 기와는 건축에서 가장 나중에 공사하고 가장 높은 곳에 얹는 자재다. 모든 건축물을 위에서 덮으며 무겁게 조영한다. 기와의 이러한 특수성이 다음에 전개할 기와 이름의 상징성을 해명할 배경이 된다.
이러한 기와가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기원됐으며 어떤 문화적 상징과 해석이 가능한지, 그런 것을 한 번 알아보자는 것이 이 글의 시도이다.

기와의 기원
기와의 기원에 대해서 『古史考』에 ‘하나라 곤오 씨가 기와를 만들다(夏時昆吾氏作瓦)’라는 기록이 있지만 그것은 전설적인 이야기이고, 동양에서 기와의 출현은 불확실하지만 대체로 西周 초기로 잡고 있다. 그 이유는 가장 이른 시기의 와당이 陝西 扶風 召陣에 있는 西周 中期 궁전 건축 遺址와 岐山 村 西周 유지에서 출토됐기 때문이라고 한다(申雲艶, 『中國古代 瓦當硏究』, 文物出版社, 2006, 8쪽). 그러나 기와의 기원은 아직 확실한 물징이 나타나진 않았지만, 서주 이전 즉 商代 말기부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전국시대 와당이 진한의 와당과 비교해서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고급화된 것을 보면 그런 추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기와의 사용은 대체로 漢문화가 유입된 낙랑시대부터라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낙랑 유지에서 출토된 와당과 塼의 물징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삼국시대엔 고르게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여러 도성에서 이미 기와 사용이 보편화됐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전문도록으로 일찍 나온 것은 『신라의 기와』(한국건축사대계Ⅴ, 동산문화사, 1976)와 『百濟瓦塼圖錄』(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83) 정도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기와나 와당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엷었다. 그러나 최근 10~15여 년 사이 국내에선 기와와 와당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일본인 「이우찌 수집 瓦기증전」은 와당에 대한 관심을 모으는 촉매제가 됐다. 이후 주목을 끄는 기획전시도 잇달았다.
- 「이우찌 수집 와전 1천82점 기증전」(1987년, 국립중앙박물관 )
- 「新羅瓦當-아름다운 신라기와, 그 천년의 숨결」(2000년, 경주국립박물관)
- 「유창종 기증 1천873점 瓦·塼 기획특별전」(2002년, 국립중앙박물관)
- 「隱逸의 수려한 꿈-新羅瓦當」(2005년, 영남대박물관)
- 「기와에 담긴 700년의 숨결, 百濟瓦塼」(2010년, 국립부여박물관)

이 가운데서 유창종 와전 기증은 획기적인 일이며 와전의 문화적 중요성을 일깨운 쾌거였다.
그런데 큰 기획전시의 도록에는 필수적으로 논고가 실려 있으며, 쏟아져 나온 수십 편의 기와 연구 석·박사 논문도 있지만 문제점이 있다. 편년, 지역적 특성, 문양 분류, 계보의 변천 등의 연구는 활발한데, 그런 것에만 치중할 뿐 왜 그런 문양, 그런 계보가 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돼 변화과정을 겪었느냐 하는 발생학적 究明과 상징 해석에 대한 연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점이다.


그 이유는 문양에 저장된 정보를 전혀 해독하지 못한 채 즉물적인 기존 분류방법에만 의존하는 한계성 때문일 것이다. 문양은 역사적 기억에 저장된 뇌의 지문과 같은 ‘문화의 거울’이다. 문양에 내장된 이런 배경을 짚어내지 못하면 새로운 해석이 나올 턱이 없다. 그러므로 연구자들은 껍데기만 긁어 맛을 내는 얄팍한 학문의 속성주의를 경계하고 뿌리를 드러내어 원류를 찾아 엄중하게 비판할 것은 비판해서 학문의 페이지를 늘릴 생각을 해야 한다.

기와집 건축의 발상 모티브
집이라는 삶의 공간은 모든 생명체가 다 같이 자신에게 알맞은 공간을 장만하고 사는 공통점이 있다. 벌레들도 마찬가지지만 그것은 일단 별도로 하고, 두 발 달린 새[鳥類]와 네 발 달린 짐승[獸]을 비교해보면, 집다운 집을 짓는 쪽은 단연 새들이다. 새는 집의 건축사라 불릴 만큼 부리 하나만으로 정교한 집을 짓는다.


樹上생활과 혈거생활을 거친 원시시대의 인간들은 주거의 형태를 새집에서 발상의 힌트를 얻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실제로 동양의 기와집들은 날개를 짝 편 새의 비상형태를 닮았으므로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건축의 기원에서 이런 이론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기와집 추녀의 들린 모습과 새의 갈비뼈와 같은 노출된 서까래[그림5], 몸집이 가벼운 새처럼 아래를 비운 마루, 공기 유통을 쉽게 하기 위한 많은 문구멍, 솔개의 깃털을 닮은 지붕의 촘촘한 기와, 용마루 양쪽 끝머리를 장식하는 치미(尾) 등을 살펴볼 때, 영락없이 神鳥 솔개의 형태에서 기와집은 발생학적 기원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지붕의 기왓골은 솔개의 가지런한 깃털 그대로다. 이러한 현상은 고대 鳥夷들의 새숭배사상이 그 배경일 것으로 짐작되지만, 고문헌에도 “東北夷들은 새를 사로잡아 그 고기를 먹고 그 껍질을 옷으로 삼는다. 일설에는 海曲에 거주하면서 피복과 기거 동작이 모두 새의 형상과 같다(此東北之夷, 搏取鳥獸, 食其肉而衣其皮也. 一說, 居在海曲, 被服容止, 習象鳥也)”(顔師古, 『漢書·地理志』 ‘翼州鳥夷’ 注)라고 한 문징이 이를 뒷받침한다.

기와 이름의 상징과 해석
기와의 기원이 언제부터인가라는 문제보다 기와의 문화적 상징과 해석이 더 관심을 끄는 이유는, 어떤 발상에서 그러한 기물을 고안하게 됐을까 하는 문제가 더 흥미롭기 때문이다. 기와를 만들게 된 발상의 모멘트는 과연 무엇일까.


‘기와’란 어휘는 고유어인지 한자어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국어사전엔 한자를 병기하지 않아 고유어로 분류돼 있지만, 어감도 고유어가 아닌 듯하고, 기와의 ‘와’자가 한자 ‘瓦’가 아니라면 어원 설명은 불가능해진다. ‘기와로 지붕을 덮다’의 뜻인 ‘蓋瓦’가 ‘기와’로 변음된 말이라고 하는데, 국어사전엔 두 어휘가 모두 없는 단어다.


기와의 고어는 ‘디새’인데, 디새가 어떤 이유에 의해서 ‘기와’로 교체됐는지 그 이유를 아무도 모른다. 디새의 형태분석은 디다[落]의 어근 ‘디’에 명사 ‘새[鳥]’가 합성된 ‘디[落]+새[鳥]’의 형태로서 그 뜻은 ‘땅 위에 내려앉은 새’란 뜻으로 풀이된다. 사실 초가는 땅위에서 날개를 접고 고스란히 앉아 있는 새의 모습과 같고, 기와집은 그 모양이 솔개가 땅위에서 날개를 펴고 막 날려는 모습과 같다. 자연은 모든 문명의 시원이다.


기와의 이름엔 여러 종류가 있다. 디새, 막새, 암막새, 수막새, 망새, 드림새 등인데 모두 ‘새’ 자가 붙어 있다. 또 치미의 ‘’도 ‘솔개 치’ 자다. 치미의 고유어는 ‘망새’, ‘바라기’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위의 기와 이름들은 새[鳥]와 관련이 깊은 단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논급한 바와 같이 기와 발상의 모티브가 솔개의 깃이라든지 기와집의 외형이 비상하려는 솔개의 자태와 같다고 한 점은 바로 기와의 이름이 만들어진 배경을 암시하고 있다. 모든 이름은 그냥 지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그 내용에 합당한 단서가 있으며, 그 단서에는 또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기와 이름을 분석해 기와가 발생한 모티브를 찾거나 물징을 제시하려는 글을 아직 보지를 못했다.


치미만 해도 그 이름이 왜 치미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풀어준 해석이 아직 없다. “치미는 용마루 양쪽 끝에 사용되는 기와로 건물의 장중함과 반전감을 보여주는 邪的 성격의 장식적 효과를 위한 기와”(김성구, 「新羅기와의 성립과 그 변천」, 『新羅瓦塼』, 국립경주박물관, 2000, 430쪽) 라는 것이 설명의 전부다. 그러나 치미는 ‘장중함과 반전감을 보여주는 벽사적 성격’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고건축물의 상징성을 함축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궁전과 사찰, 廟宇의 맨 상층 용마루 양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치미의 상징성을 이미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그림6]의 황룡사지 출토 치미는 높이 182cm의 크기와 장식문양의 특징 면에서 신라 최대 거찰인 황룡사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가장 대표적인 치미다. 그런데 이 치미의 측면과 등에 장식된 문양[그림7]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이 문양들을 대부분 연화문으로 해석하지만, 원형은 모두 태양을 意符한 문양이다. 치미는 神鳥인 솔개를 기와의 몸통으로 하고 태양의 상징문양을 기와의 양옆과 등에 장식했다. 핵심은 태양과 새(솔개)의 복합문양이란 점이 와당을 비롯한 기와 문양의 해석에 있어 아주 중요한 요체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림10]의 (1)과 (3)의 문양도 학계에선 同心圓 또는 丸紋·環紋 등으로 부르지만, 이 문양들의 원형질은 모두 태양문이다. 이와 같이 와당과 치미 등에 태양문을 집중적으로 시문하는 까닭은 건축에서 지붕이 지닌 속성 때문이다. 지붕의 속성은 태양빛을 가장 많이 받는 자리이므로 지붕에 장식되는 문양과 태양은 불가분의 관계가 성립된다.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태양의 상징인 불꽃무늬를 지붕 위에 사실적으로 그린 벽화가 있는데[그림8], 그 이유는 태양숭배의 고구려 사유, 즉 東明사상을 표현한 고구려 식의 상징기법이기 때문이다. 건물의 상층인 지붕과 태양의 상관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하겠다.

치문(吻)과 치미(尾)

제일 먼저 치의 '’ 자가 왜 ‘솔개 치’ 자를 썼을까. 이 의문이 해결되면 모든 궁금증은 풀어진다. 허다한 이름을 두고 왜 솔개가 등장했을까. 그것은 태양숭배족이 神鳥 솔개를 태양과 동격시해 와당의 문양으로 상징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누누이 설명한 바 있지만, 태양숭배의 원형이 다시 새숭배사상의 사유세계로 이동해 두 가지 상징은 복합적으로 여러 기물에 표지된다. 치미도 바로 그런 원형의 상징물인 것이다. 이른바 치미는 치미(尾)와 치문(吻) 두 종류가 있다. 치문은 솔개의 부리 부분을 형상화한 기와이고, 치미는 솔개의 꼬리 부분을 형상화한 기와인데, 중국에선 치미가 치문보다 조기에 나타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치미는 唐 이후부터 龍頭, 꼬리긴 새[翹尾], 고기[魚] 등 변형치미가 등장된다(『中國風俗辭典』, 상해사서출판사, 1990, 454쪽).


[그림10]은 전부 솔개의 꼬리가 아닌 부리를 형상했다. 이처럼 치미와 치문은 형태상 구별이 뚜렷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구별하지 않고 치미 한 가지로만 부르고 있는데, 이런 용어상 문제도 좀 더 치밀해 유물의 정확한 관찰력이 부족한 소치란 소리를 듣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일이다.

와당 문양의 상징과 해석
와당은 우리말로 ‘막새’라고 한다. 막새에는 원형수막새와 평형암막새 및 이형수막새가 있다. 그런데 우리말 막새보다 와당이란 단어가 더 보편화됐다. 한자 사용을 기피하면서 한자용어로 바뀌는 것은 희한한 일이다. 와당은 밑에서 지붕을 쳐다보면 가장 확연하게 눈에 들어오는 장식이므로 와당의 문양은 고대 사유를 압축한 문양의 상징세계나 다름없다. 전국시대와 진한시대의 화려한 황궁의 와당은 황제의 권위와 신분을 상징하기 위해 [그림11]의 (1), (2), (4)처럼 지고지순한 태양을 회돌이문양으로 意符한다. 와당 문양의 종류는 태양숭배사상을 반영한 태양문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은 새숭배사상에서 유래된 태양조[神鳥] 문양[그림12]이 다수 있다. 그 외에는 문자, 동물, 수목, 개구리 등이 섞여 있으나, 문자와당은 우리나라에선 드물고, 동물은 주로 말, 사슴 등 陽氣를 상징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문제는 연화문의 원리는 그 母型이 태양문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와당의 문양을 전부 연화문 중심으로 분류해 놓은 데 있다. 즉 태양문이 중심주제이고 연화문은 그 변형인 한 종류에 불과할 뿐인데도 마치 연화문이 중심 모티브인 것처럼 잘못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고대 문양의 상징해석을 모두 불교적 시각으로 해석하려는 편향된 태도가 빚은 결과다. 이런 시각은 태양숭배와 새숭배의 천손족 고유사상을 배제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러므로 한민족 문화의 원형과 문양의 상징성을 오독한 즉물적 이름과 분류방법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한번쯤은 되돌아봐야 시점이다.

백제 와당의 특징과 태양숭배사상
백제의 이른바 素紋 와당[그림13-(1), (2), (3)]과 巴形와당 [그림13-(4),(5),(6)]은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특수한 문양이다. 백제에서만 왜 이런 문양이 생겼을까, 그 배경은 무엇일까. 이런 究明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림14]의 (1), (2)를 이른바 소문이라 하고, (3)은 重環紋이라 하는데, 이것은 모두 태양의 원형을 그대로 표현한 백제 사람들의 소박한 상징기법이다. 이런 바탕사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양이 없는 바탕 즉 ‘素紋’이라고 한다면, 그 바탕의 실체는 무엇인지 그것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태양문의 첫 순서는 이른바 素紋이라고 하는 바탕태양문[그림13-(1),(2)]이 일차 단계이고, 다음 단계는 重環太陽紋[그림13-(3)]이다. 태양문을 중복해서 디자인한 문양이 중환태양문인데 가운데가 볼록 올라와서 더욱 사실감을 느끼게 하는 도상이다. 삼 단계는 이른바 파형와당[그림13-(4), (5), (6)]인데, 이것은 태양 에너지의 회돌이를 動勢로 표현한 문양을 말한다. 앞에서 巴形銅器를 설명할 때, 파형이란 용어를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일본 고고학계의 용어인 파형이란 용어를 버리고 대신 ‘旋形’ 또는 ‘회돌이형’으로 개칭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와당의 문양은 그 뒤 다양한 형태로 변화를 거듭하면서 시대의 미감을 담아내는 독특한 영역으로 발전한다. 와당문양의 이러한 전개 원리와 거기에 표현된 문양의 배경사상을 해독하려면 연화문 일색으로 몰아붙이는 즉물적인 편견부터 버려야할 것이다.


와당은 추녀의 서까래 끝을 마감하는 건축 자재다. 이런 와당에 나타난 장식문양은 고대사상이 압축된 상징의 세계다. 그 간결한 상징의 해석부터 먼저 하는 것이 해석의 순서다. 오늘날의 시각을 잣대로 형태만을 보고 멋대로 양식 분류하는 것은, 마치 성분을 모르고 약을 약봉지에 나눠 담는 행위나 다를 바 없다. 뿌리를 모르는 그런 무분별한 오류는 한국미술의 기초인 문양에 대한 상징과 해석을 오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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