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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미적 이성,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 심미적 이성,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 문광훈 고려대
  • 승인 2002.10.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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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정치에 걸친 인문적 삶의 태도로서의 물음
 ◇ 문광훈 고려대 연구교수 · 독문학
심미적 이성은 부단히 교정해가야 할 삶의 어떤 척도다. 탐구의 정신이자 삶의 양식 또는 태도이다.

그의 작업은 삶의 화해적 질서 가능성에 대한 실존적 탐구의 유례없는 산물이기도 하다.

어떤 일에나 격식이나 형식이 필요한 것이지만, 또 이 형식으로 하여 어떤 글에도 제한과 규정이 있기 마련이겠지만, 그러나 내가 즐겨 읽는 또 즐겨 읽어온 책에 대해 몇 쪽의 또는 한두 편의 글을 쓰는 데 나는 늘 주저를 느낀다. 단순화에의 두려움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주제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글을 써온 데에는 그 나름의 절실함이 있을 것이고, 어떤 독자의 오랜 글읽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해 오랫동안 되풀이해 읽을 만한 글이지 않다면, 그것은 흔히 그러하듯이 간편하게 ‘요약’되거나 ‘정리’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김우창의 글은 이렇게 홀가분하게 정식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또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글이라면, 나는 대체로 읽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김우창의 심미적 이성에 대한 재검토의 준비가 내게는 돼 있지 않다. 이것은 물론 나의 무능에서 오는 것일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장은 대개 그에 상응하는 크기의 반성력에 의해서만 제대로 평가 수용돼 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나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주저의 더 큰 이유는 아직 나는 그를 읽고 고민하며 배우는 중에 있음에 있다. 그럼에도 이 일을 피할 수 없다면, 나는 자주 지적되는 우리 이론에 대한 객관적 기준의 미설정이나 보편적 설득력의 필요성 이외에 나는 두 가지 기본적인 사항을 먼저 언급하고 싶다.

삶은 풍부하고 다양한 가능성
첫째, 검토대상에의 친화력이다. 비판적 검토에서 필요한 것은 객관성 혹은 공정성에 대한 순수의지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해당 저작이 보여주는 반성력과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여기에서 대상으로서의 글과 나의 글, 저자와 독자 사이의 화응의 정도, 즉 친화력은 결정적이다. 이 친화력이란 그러나 양자사이의 무조건적인 동질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낯섦과 충격을 동반하는 반성의 방식과 그 호소력에서 차츰 생겨나는 종류의 것이다. 이런 친화력 없이 우리는 대상을 공감적 이해 속에서 읽을 수 없을 것이며, 설령 읽는다 해도 그것을 몇 가지로 약술하는 데 불편해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땅의 적지 않은 글이, 특히 인문학에 관계되는 글이 되풀이해 읽고 싶을 정도의 친화력과 반성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쾌도난마의 단죄와 확정을 담은 글이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 것은 이 점에서 보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비판적 검토에서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이론 자체의 자기반성이다. 독자주체가 대상에 대해 갖는 친화력이 공감의식 또는 이해와 경애의 감정을 갖게 한다면, 이론 자체에 요구되는 것은 자기 한계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다. 자명하게도 이론은 납득할 만한 추론의 방법과 절차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른바 ‘논증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하나의 이론은 우리의 이론, 하여 믿고 옹호하며 또한 의지하고 싶은 것이 되는가. 좋은 이론은 논증적 정합성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이것은 인문과학에서 더 그러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는 채로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에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논리적 설득력은 이론에 있어 중요하지만, 그것은 이론의 건축적 체계를 구성하는 한 요소일 뿐이다. 논리는 인식의 조건이지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한계를 직시해야 하고, 이 한계의 직시를 위한 반성력을 자기 안에 내장해야 한다. 나아가 하나의 이론은 논리의 문제만이 아니라 삶의 일부에 속한다. 따라서 이론은 마땅히 삶의 전체 속으로 통합돼야 한다.

그렇다면 김우창의 심미적 이성의 윤곽은 어떻게 그려질 수 있는가. 심미적 이성이란 무엇인가. 왜 그것은 ‘심미적’이고, 여기에 왜 ‘이성’이 붙여져 있는가. ‘심미적’이란 말 그대로 아름다움 또는 이것과 연관된 것을 느끼고 즐기는 것과 관계한다. 이 감각과 향수는 삶의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일이다. 이에 대해 이성은 정신의 원리, 보다 정확히 말해 자기갱신적 변증의 원리이다. 이성의 이 자기갱신은 반성력으로부터 온다. 이것은 왜 필요한가. 감각만의 삶은 현상적 현실의 표면 위에 머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느끼고 즐기는 일만큼 이 느낌과 즐거움을 생각하고 반성하는 일이 필요하고, 이 반성적 자기점검의 원리는 생생한 경험현실에 의해 다시 확인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심미적 이성은 사물을 가장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지각하고 향수하는 가운데 이 구체성을 넘어 보다 일반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는 자기확장적 반성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뭔가 추상적이고 생경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강조돼야 할 것은, 심미적 이성의 이념이 김우창에게 있어 미리 정해진 어떤 관점이나 원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거듭 중시하는 것은 삶의 지금 여기,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와 우리 모두의 삶, 이 삶의 풍부하고 다양한 가능성의 전체이다. 그는 그 어디에서도 삶의 모든 것을 이미 알아버린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정치적 견해나 역사적 관점 그리고 현실관을 복무해야 할 어떤 것으로 상정하는 대신 그는 끊임없이 묻고 탐색한다. 심미적 이성은 이 질의와 탐구의 원리이다. 그것은 글을 전개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하나의 그러나 핵심적인 토대일 뿐이다. 나는 경험과 사유, 사실과 언어가 그토록 이완될 줄 모르는 완강한 일체성을 보인 예를 우리 땅에서만이 아니라 서구의 지적 풍토에서도 그리 흔히 경험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스케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본적인 사항을 일깨워준다.

경험과 사유·사실과 언어의 일체성
첫째, 심미적 이성의 기획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도저한 자기반성력과 이 반성력에 의한 지속적 탐구력이다. 이 반성력으로 하여 그의 글은 내면적이고 개인적이며, 때로는 내밀하고 사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주관성은 반성력의 매개에 의해 그것을 넘어서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다. 그의 글은 어떤 것이나 반성적 계기에서 출발하기에 그 어조는 낮으며, 탐구적 열정에 의해 추동되기에 정지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상태에 있다. 사고의 이런 부단한 이행 속에서 그는 관련되는 사안을 최대한의 가능성 속에서 충분히 검토하고자 한다. 이것은 검토되지 아니한 개념이나 관점에 의한 삶의 단순화와 왜곡을 그가 가장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심미적 이성의 토대는 근본적으로 문학예술적이다. 김우창의 반성력은 예술언어의 성찰력으로부터 오고, 이 예술적 성찰력으로부터 그의 현실관, 사회와 정치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 문화와 문명 그리고 환경에 대한 그의 견해가 결정화돼 나온다. 여기에서 시는, 시적 인식은 그의 이념체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지도원리이다. 그것은 환원될 수 없는 구체적 경험의 작고 사소하고 미묘한 굴곡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미적 이성에 대한 접근은 이 이념 자체에 대한 이론적 개괄을 통해서보다는 시에 대한 평문들 가운데 하나에서 시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셋째, 심미적 이성은, 여하한의 이론적 왜곡가능성에 경계한다. 이것은, 그것이 개념이나 논리가 지닌 규정과 단정에 대해 그가 비판적 거리를 둔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이성의 토대 위에 있기에 어떤 삶의 질서를 향해 나아가지만, 이것이 논리의 폐해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기에 대상을 자의적으로 평준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이론적 작업의 추상화를 경계하면서도 삶의 보편적 척도의 가능성에 눈감지 않고, 보편적 가치의 입안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근거한 사실적인 것의 구체성에 몰두한다. 이 모순된 요구를 관통하는 것은 경험현실에 대한 정직한 이해의 의지이다. 따라서 심미적 이성은 논증적 이론적 이성이라기보다는 삶의 이성, 생활 세계적 공감의 이성이라 할 수 있다.

넷째, 그의 글의 색채[文彩]의 다양성이다. 시적 인식을 토대로 한 반성력으로 심미적 이성은 삶의 다양한 모습을 다채롭고 풍부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다양성과 일관성 사이를 오고가면서 대상을 드러내는 문체에서 나오는 것이면서, 이 문체의 내용을 이루는 반성적 사유로부터 오며, 이것은 이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열린 지각의 결과이기도 하다. 형식적 내용적 다양성의 일관성은 궁극적으로는 그의 내적 일관성으로부터 오는 것일 것이다. 이 일관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마도 안과 밖, 내면과 외부를 투명하게 하는 마음 - 虛靜한 시의 마음일 것이다. 시의 허정한 마음이 김우창의 감각과 사고의 양식, 표현양식 그리고 삶의 양식을 하나로 관통한다.

위의 네 가지 요소는 결국 심미적 이성의 이념이 단순한 이론 체계 이상의 것이 아닌가 여기게 한다. 일정한 이론모델이라기보다는 오랜 탐구의 반성적 결과물이라면, 그것은 학문활동에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 삶 일반의 바탕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은 ‘이론’으로 불려지는 대개의 것이 그러하듯, 서너 편의 논문이나 한두 권의 책 속에 깔끔하게 정리돼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저작을 통해 나타난다.

탐구의 정신 위에 세워진 과제들
심미적 이성은 그가 쓰는 거의 모든 글의 전경 혹은 배후를 이루면서 고수돼야 할 고정불변의 준거틀로서가 아니라, 가끔씩 확인하고 상기하며 또 부단히 교정해가야 할 삶의 어떤 척도, 더하게는 내면화된 태도로 자리하는 것이다. 그의 심미적 이성은 탐구의 정신이자 삶의 양식 또는 태도이다. 이것은, 예술의 세계란 다름 아닌 돌아가야 할 본래적 양식으로서의 삶을 추구한다고 할 때,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게서 이론과 실천, 삶과 학문의 일치를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날 두렵게 한다.

심미적 이성이 탐구의 정신 위에 세워진 우리의 이론이면서 인문적 삶의 한 태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만의 또는 문학자만의 관점이 아닐지도 모른다. 심미적 이성은, 인문학도라면 누구나가 한번쯤은 고민해봄직한 또는 체현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의 한 이념적 전형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김우창의 심미적 이성은 삶의 화해적 질서 가능성에 대한 실존적 탐구의 유례없는 산물이다. 단지 이러한 진단이 좀더 튼실한 동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그에 의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후학에 의해서, 그의 논의를 좀더 세부화하는 후속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이 작업의 의의는 물론 지금의 그리고 앞으로의 후학이 그의 저서에서 제각기의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이 문제의식을 자기 분과 속에서 어떻게 심화·확대할 수 있는냐에 달려 있다. 그의 저작을 크게는 우리의 철학적 지성사적 문화론적 전통과 관련하여, 좁게는 시평과 소설평을 포함하는 국문학 비평(북한문학 포함)과 외국문학론, 예술론, 정치철학, 현실진단 등의 분야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그런 작업의 몇 가지 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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