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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논문 위해 이국땅 현장 속으로 들어간 ‘맨발의 학자들’
박사논문 위해 이국땅 현장 속으로 들어간 ‘맨발의 학자들’
  • 김봉억 기자
  • 승인 2014.04.07 0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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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지역연구자 6명의 ‘현지조사’ 이야기

“꼭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으나 조심스러웠던 사람들은 국경 지역의 소위 ‘밀수꾼’들이었다. 물론 그 사람들에게 한두 마디씩 던지고 필요한 정보를 구할 수도 있었으나 좀더 깊이 있게 그 사람들의 경제 활동에 관해 알고 싶었다. 나는 머이 강 유역의 국경지역을 즐겨 방문했는데, ‘태국-미얀마 우정교’라는 다리가 있는데도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배를 통해 비공식적인 무역이 태연하게 이뤄지고 ‘밀수꾼’들이 태국 군인들 옆에서 평화롭게 물건을 파는 광경이 무척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분단의 조건에서 성장해 국경을 연상하면 곧 닫힘과 철조망이 떠오르고 비공식적인 국경 넘기는 곧 죽음으로 연결된다고 알고 있는 내가 그런 일탈적인 장면이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그 국경 지역에 매료되는 것은 당연했다.”

이상국 연세대 교수(41세ㆍ문화인류학과)는 지난 2007년 싱가포르국립대에서 ‘태국-미얀마 국경지역에 거주하는 이주민’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주요 국경 도시인 매솟에서 2004년 7월부터 2005년 7월까지 머물며 현지조사를 했다.

이 교수를 비롯한 6명의 동남아시아 지역연구자들이 박사학위 논문을 수행한 현지조사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 『맨발의 학자들』(눌민 刊, 2014년 2월). 책 이름이 재미있어서 한 눈에 책을 집어 들게 됐다. “맨발이라는 표현은 현지의 후텁지근한 기후 환경, 실내는 물론이고 거리에서도 양말을 신지 않는 현지의 보통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맨발이었다는 것은 동남아 현지로 들어가 현지인들과 친구가 되고자 희망했고, 그렇게 희망하는 것을 규범으로 여기는 지역연구자들이었다는 뜻이다. 지극히 소박한 방법론을 사용했다는 측면에서도 우리는 맨발이었다.”

이 책의 대표 편저자인 전제성 전북대 교수(49세ㆍ정치외교학과)는 “현지조사는 지역연구 방법론에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해야 하고, 지역연구의 발전을 위해 세세한 부분까지 공개되고 공유될 필요가 있다는 점에 공감하고 이 책을 함께 집필하게 됐다”라고 말한다. 전 교수도 박사 논문 집필을 위해 지난 2000년 1월부터 2001년 5월까지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현지조사를 했다. 이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인도네시아 노동정치’를 주제로 2002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했다.

김형준 강원대 교수(49세ㆍ문화인류학과)는 자바 중부 농촌 마을에서, 홍석준 목포대 교수(53세ㆍ문화인류학과)는 말레이시아 농촌 마을에서, 채수홍 전북대 교수(51세ㆍ고고문화인류학과)는 베트남 다국적 공장에서 현지조사를 했다. 황인원 경상대 교수(49세ㆍ정치외교학과)는 말레이시아 정치 변동을 연구했다. 이들 정치학자와 인류학자는 동남아시아에서 정치인부터 산업노동자, 농촌주민, 난민과 사회단체 활동가 등을 만났다. 생활이나 학업은 현지 ‘밖에서’ 이뤄지다가 논문 작성을 위해 ‘속으로’ 들어갔다.

‘속으로’ 들어갔지만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적응해 나가는 일은 사실, 겪어 보지 않으면 답이 없다. “농촌에서 조사를 하다 보면 함께 농사일을 해야 할 때가 많다. 농민들은 열심히 일을 하는데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고 ‘문화’에 관해 이것저것 질문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뿐 아니라 윤리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논에 들어가 함께 일을 하는 것도 참 난감하고 민망한 일이다. 나는 주민들의 허락을 얻기로 했다. 주민들의 허락을 얻은 뒤에 일을 하게 됐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문제가 됐다. 나를 ‘한국에서 온 머슴’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나중에는 일을 시키기까지 했다. 내가 정중히 일을 거절하자 ‘다른 집 일은 해주고 내 집 농사는 왜 도와주지 않느냐?’는 등의 불만을 털어 놓기도 했다. 참으로 난감했다. ‘일을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왜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하느냐? 우리가 대답해준다고 무슨 득이 되겠느냐?’는 식으로 나를 몰아붙이기도 했다.”(홍석준 목포대 교수)

‘맨발의 학자들’은 현지조사는 어떻게 계획했는지, 조사 자금은 어디서 마련했는지, 현지어는 어떻게 학습을 했고 어느 곳에 자리를 잡고 착수했는지, 현지의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았는지, 현지인들과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 등 현지조사를 위한 구체적인 생활과 삶을 썼다. 전 교수는 “우리는 박진감 넘치는 모험과 성장의 드라마처럼 이 책이 읽혀지길 바란다”고 했다. 동남아 현지의 다양한 풍경을 그려보고 그곳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을 들여다보는 여유를 갖기도 바랐다.

이들은 동남아 지역연구의 ‘제3세대’에 속한다. 제1세대는 비전공자의 부수적인 연구가 주종을 이뤘고, 제2세대는 전공자라 하더라도 문헌연구 방법에 근거했다. 제3세대 연구자는 현지어를 습득하고 현지조사를 거쳐 동남아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한 세대를 가리킨다.

전 교수는 “이 책은 ‘지역연구 후속세대를 위한 회고와 고백”이라며 “우리의 이야기를 발판 삼아 우리보다 더 준비된 창의적인 현지조사를 계획하고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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