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 에세이 공모전에 부쳐]
[교수신문 에세이 공모전에 부쳐]
  • 교수신문
  • 승인 2001.01.0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1-01-02 16:44:39
‘에세이’ 의미 바로잡는 계기로

유종호/연세대 석좌교수·국문학

“반론하고 논파하기 위해 읽지 말라. 통째로 믿어버리기 위해서 읽지도 말아라. 화제나 논제를 찾게 위해서도 읽지 말라. 그러지 말고 심사숙고하기 위해서 읽어라. 어떤 책들은 그저 맛만 볼 것이며, 어떤 책들은 들이키기만 하면 되고, 소수의 책만이 잘 씹고 소화할 만하다….독서는 충실한 인간을 만들고 대화는 지각 있는 인간을 만들고 글쓰기는 정확한 인간을 만든다.” 교양영어를 포함하여 대학에서 교양과목을 이수한 사람들은 그 과정에 아마도 위에 적은 취지의 내용을 본문이나 인용문의 형태로 접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학문에 관해서’란 글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글은 베이컨이 1597년에 10편의 글을 모아 ‘Essays’란 제목으로 책을 냈을 때 첫머리에 실려 있던 글이다. 그후 베이컨은 2판과 3판을 냈고, 그때마다 수록편수는 늘어나 1625년에 나온 3판에는 도합 58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영어에서 본래 ‘시도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는 에세이란 말이 ‘試論’이란 뜻으로 쓰인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1580년 프랑스의 몽떼뉴는 최초의 책을 내면서 ‘Essais’란 표제를 붙였다. 말뜻은 영어와 같았는데 이것이 하나의 글 장르를 뜻하는 ‘essai’란 말의 최초의 용례로서 몽떼뉴가 사실상 이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니까 에세이에 관한 한 프랑스가 영국에 한 발자국 앞서 있었고 베이컨이 몽테뉴의 선례를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베이컨의 에세이는 가령 ‘진리에 관하여’ ‘재판에 관하여’ ‘노여움에 관하여’와 같은 표제에서 엿볼 수 있듯이 삶의 이러저러한 문제에 대한 명상과 성찰을 담은 것이다. 간결하고 교훈적이며 얼마쯤 초연한 듯한 태도가 엿보이는 그의 에세이는 한두 페이지로 된 짤막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몽떼뉴나 베이컨 이전에 에세이에 해당하는 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명한 황제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나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끼친 세네카의 글들은 이 장르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에세이는 물론 산문으로 씌어졌지만, 18세기 영국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거대한 존재의 연쇄’를 다룬 그의 철학적 장시에 ‘An Essay on Man’(인간론)이란 표제를 붙였다. 히틀러의 집권 직후에 망명한 독일 태생의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의 마지막 저서 ‘An Essay on Man’(인간론)이 포프의 시를 염두에 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큰 책은 큰 죄다’란 레싱의 말에 공감하면서 쓰여진 이 명저나 ‘인간오성론’으로 번역되는 로크의 두툼한 책이름이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이란 것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에세이는 결코 가벼운 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몽테뉴나 베이컨의 에세이 책은 흔히 ‘수상록’이라고 번역된다. 이러저러한 생각을 비교적 자유롭게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한편으로는 중요한 주제를 중후하게 다룬 본격적인 에세이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자유롭고 격식을 차리지 않는 에세이가 있는데 그 양극 사이에 다양한 형태와 양식이 존재한다. 발레리나 엘리엇의 시론도 에세이요 조지 오웰이나 싸르트르의 정치적 시사론도 에세이다. 알랭의 인생론이나 바르트의 신화론도 에세이요 요즘 서울대학의 이상옥 교수가 유려하고 정확한 필치로 번역하여 ‘기싱의 고백’이란 표제로 출간된 수상록도 에세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에세이를 수필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오도적이다. 隨筆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란 정도의 뜻인데 일본쪽에서 처음 씌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6세기에 나온 ‘東齊隨筆’이란 책이 최초의 용례이나 실화나 전설집의 뜻으로 쓰였다고 한다. 근래에 신문이나 잡지가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짤막한 글을 요구하게 되고 이러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생겨난 글에 이 말을 붙인 것이 우리쪽에 유입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에세이는 우리의 경우 매우 생소하고 희귀한 장르라고 해야할 것이다. 고전쪽의 ‘西浦漫筆’ 정도가 도리어 본격적인 문학 에세이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수필 하면 곧 신변잡기라고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신변잡기라고 해서 홀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신변잡기에도 좋은 글이 있고, 기세등등한 자칭 에세이에도 수상쩍은 글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본격적인 에세이가 참으로 희귀하다. 그것은 체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개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억압하는 지적 풍토와 연관된다. 천박한 날림글이 횡행하는 우리 처지에선 에세이가 각별히 육성할 가치가 있는 홀대된 분야라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