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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문필공화국의 지식인들은 어떻게 빛날 수 있었을까
18세기 문필공화국의 지식인들은 어떻게 빛날 수 있었을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04.01 17: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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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역사’ 조명한 이영석 광주대 교수


“오랫동안 잉글랜드와 갈등을 겪어온 스코틀랜드는 18세기 초 잉글랜드에 합병된다. 그러나 같은 세기 중엽 이 작은 나라에서 전개된 지식인 운동이 근대성에 관한 담론을 주도하고 19세기 영국문화의 주류를 형성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영석 광주대 교수(서양사)가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역사를 조명한 새 책을 내놨다. 『지식인과 사회』(아카넷, 442쪽, 20,000원)다.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애덤 퍼거슨 등은 잘 알려졌고, 이들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연구도 제법 축적돼 왔다. 문제는 이들의 지적 활동을 ‘영국문화’의 일부로 여겨왔다는 것. 이들 지식인 운동을 18세기 후반이라는 특정한 시기, 스코틀랜드 고유의 지적 활동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근래에 이뤄졌다. 이 교수가 그런 시각을 일찍부터 제기해 왔다. 이 책은 그런 시각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특정 지식인 집단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일은 녹록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교수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전체적 조망’을 미뤄왔다. “오랫동안 사회사 분야에만 매달려 온 연구 이력이 장애가 됐다. 계몽지식인들의 저술을 정리하고 종합하는 일이 쉽지 않고, 특히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짧은 식견 때문에 제대로 성찰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정신세계와 사회이론을 그들이 호흡하고 활동했던 시대의 사회적 조건과 관련지어 이해”하는 방향에서 접근했다. 작업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한국학술협의회 저술 지원이 있다.

케임브리지대 도서관에서 보낸 연구년
이 교수는 2012년 여름부터 1년간 영국에서 연구년을 보내면서 자료를 찾아 읽고 원고 쓰는 일에 줄곧 매달렸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의 저술과 그동안 쌓여온 다량의 2차 자료들을 정리하는 데 시간을 집중했다. “케임브리지대 도서관과 내가 머물렀던 울프슨칼리지를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을 보냈지만, 그만큼 나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다”라고 그는 회고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도대체 지금 이곳에서 그는 어째서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을 조명하는 데 몰두했을까. 서양사 전공자의 지적 의무? 과연 그런 이유 말고는 더 없을까. 그는 책의 후기에서 2010년 11월 일본 구마모토대에서 열린 한 학술회의에 참가했을 때 저녁 회식 자리에서 만난 세인트앤드루스대 중세사 교수 로버트 바틀릿(Rovbert Bartlett)과의 대화를 술회했다.

“왜 당신들은 그렇게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에 집착하는가? 그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짧은 시기에 끝났기에 더욱더 아름다운 것이다. 저녁노을을 바라보라. 대낮의 태양보다 더 붉게 빛난다. 어둠이 곧 몰려올 것이므로 그것은 잠깐이긴 하지만 더 붉게 빛을 낸다.” 짧고 강렬했던 빛의 광휘. 칸트가 계몽을 빛에 비유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잉글랜드의 변방이자 비주류, 주변부에 지나지 않았던 이곳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진 지식인 운동은 역사가들이라면 탐을 낼만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은 특정한 시기의 지적·문화적 개화가 그 나라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어떻게 관련되는가의 문제를 다시 성찰할 기회를 준다”라고 말하는 이 교수가 주목한 것은 이 문필공화국의 대단한 전통이 경제적 번영과는 직접 관련되지는 않았다는 대목이었다. 여기서 이 교수는 한 사회의 지적·문화적 활력이 그것을 떠받칠 수 있는 경제적 기반 없이는 오랫동안 지속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는 ‘역사의 교훈’을 발견해냈다.


스코틀랜드 19세기 영국문화뿐만 아니라 유럽문화 일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18세기 후반은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천재들의 시대’였는가 라는 질문을 자연스레 던져볼 수 있다. 이 교수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고 말한다. 알려진 대로 18세기초까지만 하더라도 스코틀랜드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후진적인 동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곳에서 창조적인 문화가 번성했다면, 도대체 그 까닭은 어디서 찾아야할까. 이 교수는 그런 창조적인 문화가 일순간 빛처럼 솟구치는 일은 개인의 천재, 개인의 창의성만으로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계몽운동의 꽃이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스코틀랜드 사회가 지닌 여러 조건들의 접점의 고유성 때문이다. “내밀한 민족감정이 문화중심주의로 승화되고 있었고, 중앙권력의 부재에 따라 자유로운 분위기가 도시민 사이에 퍼져나갔다. 장로교회의 정책에 힘입어 교육을 중시하는 풍조가 강했다. 지근거리에 있는 4개 대학들(에든버러, 글래스고, 에버딘, 세인트앤드루스)이 서로 경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학문적 교류를 자극했다.” 바로 이와 같은 사회적 조건들의 접점이 ‘용광로’가 됐고, 여기서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이 빚어진 것이다.


이 교수는 사회사 쪽에 강점이 강한 역사 연구자다. 에든버러를 중심으로 전개된 일단의 지식인 집단이 빚어낸, 그리고 이들을 만들어낸 깊은 사상적 맥락을 그의 말대로 깊이 있게 천착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는 이들 지식인 집단과 이들을 둘러싼 독자층의 형성을 중시하는 ‘사회사적 접근’을 택했고, 이를 통해 다음의 지적 탐색으로 이어지는 돌다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에든버러를 중심으로 하는 스코틀랜드 지식인 운동이 어떻게 뒷날 영국문화를 주도할 수 있었는가를 살피는 작업 말이다. 그는 이를 두고 “정치적·경제적으로 열등한 상태에 있는 작은 나라 지식인들이 어떻게 중심부 문화의 주류가 됐는가를 성찰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지식인 운동 연구에도 학제적 단초 제공
물론 그의 작업은 그가 인정한 대로 유럽 지성사 또는 사상사의 학문 전통에 밝지 않은 사정 때문에 어떤 결핍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가 들고 온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지적 풍경은 사회사적 연구 지평에서 거둔 성과라는 점, 20세기초 식민지 시기 문필가들이 앞장섰던 한국 지식인 운동, 해방후 지식인 운동 등을 새롭게 조명해볼 수 있는 학제적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기억할만한 작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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