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21:55 (토)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재구성한 인권 개념의 급진성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재구성한 인권 개념의 급진성
  • 정정훈 수유너머N 연구원
  • 승인 2014.04.01 15: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을 말하다_ 『인권과 인권들­정치의 원점과 인권의 영속혁명』 정정훈 지음|그린비|312쪽|19,000원


 인권의 정치는 결코 개인이란단자적 존재의 수준에서 이뤄질 수 없으며 연합체라는 ‘관개인적(trans-individual)’ 관계성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다!”, “함께 살자!”
2009년 실용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CEO 대통령의 집권 2년차에 경찰폭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사람들이 외친 말이다. 용산 남일당과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의 사람들. 나는 우리 사회의 현실 속에서 인권의 의미를 이 보다 더 잘 짚어낸 말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 말은 두 개의 구별된 문장이 아니라 이어서 읽어야 하는 하나의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서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함께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권의 이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권은 타인의 생존과 존엄을 희생해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든 형태의 힘에 맞서서 평등과 공생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자들의 권리다. 그래서 인권은 그 시작부터 타인의 희생에 바탕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을 불안하게 만들던 불온한 이념이었다. 이 책은 인권의 그와 같은 전복적 정치성을 다시 생각해보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사회 구성원이라면 모두가 따라야 할 도덕적 규범과 같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권리를 가진 자와 권리를 빼앗긴 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에서 권리를 빼앗긴 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정치적 이념으로서 인권의 의미를 규정해보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해방의 정치로서 ‘인권의 정치’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물론 이때의 정치는 정당에 의해 매개돼 법과 제도를 수립하거나 정비하고 운용하는 대의제 정치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권의 정치에서 정치란 일차적으로 인민이 직접적인 활동을 통해 권리들을 창출하고 쟁취해 가는 과정 일반을 의미한다. 정당과 같은 대의정치 기구들은 그 과정이 통과하는 하나의 지점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과정에서 인권은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인권이 정치, 즉 모든 권리들의 창출과정이 시작되는 原點이 된다는 뜻과 동시에 그 권리가 쟁취된 구체적 권리 형태를 뜻한다. 프랑스혁명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 혁명이 발발할 당시 제3신분의 요구는 귀족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평등이라는 인권의 한 이념은 현실의 불평등한 정치적 권리 배분을 변형하는 과정의 시작점이었다. 혁명이 성공하면서 적어도 남성 부르주아지들은 참정권을 얻었다. 남성 부르주아지는 평등이라는 이념을 현실적 권리 형태로 쟁취한 것이다.

현실의 권리체제를 변형시키는 시작점
그러나 정치적 평등이 백인 남성 부르주아지라는 특수한 범주에 국한된 제한적 참정권은 결코 평등이라는 인권의 이념에 담긴 요구를 모두 담아 낸 것은 아니었다. 현실에서 구현된 평등의 구체적인 법적, 제도적 형태는 결코 평등이라는 인권의 이념을 전면적으로 실현해 낼 수는 없었다. 이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평등이라는 인권의 이념에 호소하며 불평등한 정치적 권리의 배분체제를 변형할 것을 요구하며 투쟁했다. 다시 인권이라는 이념은 현실을 불평등을 평등한 것으로 바꿔 내기 위한 정치적 투쟁의 시작점이 됐다. 그 결과물로 남성보통선거권라는 정치적 평등권의 현실적 형태가 등장하게 됐다. 그러나 이 역시 인권의 이념에 의해 불충분한 것으로 규정된다. 배제된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평등을 평등으로 변형하기 정치가 여성들에 의해 재개된다. 이렇게 인권 이념의 제한적 실현태인 현실의 권리체제는 끊임없이 변형돼 간다.


현실의 권리체제를 변형시키는 시작점으로서의 인권을 나는 정치의 원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치의 원점으로서 인권은, 서양식 문자로 표기법을 참조하자면 ‘대문자 인권/인권(HUMAN RIGHT)’이라고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인권의 이념을 현실 속에 기입한 결과물, 즉 구체화된 권리 형태로 인권은 ‘소문자 인권/인권들(human rights)’이라고 표시할 수 있다. 인권의 정치란 바로 인권을 현존하는 권력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인권의 현실적 형태인 ‘인권들’로 구체화해 가는 과정임과 동시에 그렇게 구체화된 권리의 형태들, 즉 ‘인권들’을 변형하고 개선해가는 과정 전체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구체적인 인권들은 항상 영속혁명의 과정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인권을 이렇게 두 측면에서 파악하며 인권의 이념에 근거해서 그 현실적 형태들을 재구축해가는 영속적 과정을 인권의 정치라고 규정하고 있다. 더불어 이와 같은 인권의 정치는 결코 개인이라는 단자적 존재의 수준에서 이뤄질 수 없으며 연합체라는 ‘관개인적(trans-individual)’ 관계성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나는 이 책의 5장과 6장에 인권의 정치를 이론적 차원에서 규명하는 이와 같은 논의를 담았다. 1장과 4장은 물론 각 장별로 독립된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5장과 6장의 논의에 이르기 위한 이론적 우회작업의 성격 역시 갖고 있다. 1장은 오늘날 인권의 위기를 규정하는 계기를 신자유주의주의 통치체제, 인권 담론의 약화, 인권 감성의 쇠퇴라는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으며, 2장은 인권의 기원적 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혁명을 분석함으로써 인권이 결코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철저하게 정치적인 것임을 보이고자 했다. 3장과 4장은 인권에 대한 정치철학적 논쟁을 다루고 있다. 3장에서는 인권에 대한 비판적 논의들을 검토했고 4장에서는 인권의 정치성을 재구성하는 현대정치철학자들의 입론을 살펴보았다.

구체적인 인권현실 분석도
이 책에는 인권의 정치에 대한 이론적 작업들로 이뤄진 1장에서 6장의 논의들과는 별도로 오늘날의 사회적, 문화적 현상들에 대한 문화정치학적 분석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구체적인 인권현실을 분석하는 글들이 또한 실려 있다. 좀비문화와 신자유주의의 관계를 논의하는 프롤로그, 우리 사회의 안전담론과 폭력을 새로운 통치체제라는 맥락에서 다룬 간주곡1, 급증하는 자살 문제를 생명권력 개념과 연관 지어 분석한 간주곡2, 투명인간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정치철학적 개념들을 바탕으로 해석한 에필로그가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2009년에 시작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외침, “여기 사람이 있다!” “함께 살자!”라는, 권리를 박탁당한 자들의 외침에 대한 하나의 메아리로 읽혔으면 하는 소망의 산물이란 점을 다시 밝히면서 책에 대한 말을 마치려 한다.

                                              


정정훈 수유너머N 연구원
필자는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과학기술대에 출강 중이다.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불온한 인문학』(공저) 등의 책을 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