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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류 호모 픽투스(Homo Fictus)의 하루
영장류 호모 픽투스(Homo Fictus)의 하루
  • 박정애 강원대·스토리텔링학과
  • 승인 2014.04.01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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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눈곱을 떼어내며 생수 한 잔에 노니 가루 한 티스푼을 탄다. 이 갈색 가루는 지난 방학 때 베트남에 여행 가서 바가지를 엄청 쓰고 산 것이다. 가이드는 관광객들이 여행사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노니 이야기의 복선을 깔았다. 자기가 분기별로 한국 본가에 꼭 보내는 베트남 상품이 세 가지 있는데, 커피와 고춧가루, 모린다 머시기라는 것이다. 모린다 머시기가 무엇인가 물었더니 때가 되면 가르쳐 주겠단다.
그는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김상사‘들’이 두고 간 라이따이한들의 슬픈 이야기를, 거의 눈물이 핑 돌게끔 유장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베트남 교민들이 라이따이한들을 돕고 있다, 오늘 들르는 쇼핑센터에 가면 강의실 같은 게 있는데 거기서 라이따이한들이 한국 회사에 취업할 수 있도록 한국어교실을 연다, 아, 모린다 머시기는 노니의 학명이다, 라는 얘기를 덧붙였다. 쇼핑센터에 갔더니 좋은 일 많이 한다는 한국인 사장이 노니의 효능은 동영상으로 대체하고 사장 자신의 고진감래 라이프스토리를 이야기했고, 나는 결국 거기서 비싼 값을 내고 노니를 사고 말았다. 노니 물을 마시며 베트남 전쟁과 라이따이한과 베트남 교민들의 세계를 잠시 배회한 나는, 아침 신문을 집어 들고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에서 신문이나 책을 읽는 버릇이 안 좋다는 얘기가 문득 생각났지만, 오래된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이윽고 신문 삼매경에서 빠져 나와서는 간단한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냄비에서 무언가 끓는 시간, 나는 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페이스북과 블로그와 카페와 카카오톡과 카카오스토리를 죽 둘러본다. 아침을 먹으면서는, TV 뉴스를 배경음으로 식구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출근하는 차 안, 음악과 함께 MC가 읽어주는 시청자 사연을 듣는다. 주차장에 도착해 차를 세웠지만, 사연의 후반부가 궁금하여 다 듣고 나서야 키를 뽑는다.


먼저 학과사무실에 들러 편지함을 체크하고 조교와 어제오늘 학과에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해 두런두런 얘기한다. 연구실 내 자리에 앉아서는, 편지함에서 가져온 대학신문과 지역신문, 출판사에서 보내준 신간 소설, 동화책 들을 죽 훑어본다. 커피를 내리며 컴퓨터를 켠다. 버릇처럼 자주 가는 사이트를 서핑하다 눈물 나는 사연 하나를 읽고는 신용카드로 얼마큼의 돈을 기부한다. 휴지로 눈가를 닦은 뒤, 전자우편함을 열어보니 먼 나라 친구에게서 안부 메일이 와 있다. 우리가 공유하는 추억, 내 근황에다 시방 피어나는 개나리와 목련 사진을 첨부해 답장을 쓴다. 그리고 출판사 편집자의 이메일 주소를 클릭해 계약한 역사동화의 줄거리를 보낸다. “여주인공은 벽란도 巨商인 부친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라…”


어느새 12시. 예약해둔 도시락 두 개가 왔고, 지도 학생도 시간 맞춰 찾아왔다. 도시락을 먹으며 학생과 이른바 ‘꿈 설계 상담’을 한다. 가정형편, 진로 문제, 연애 문제, 요즘 고민 등등 학생의 이야기를 들은 뒤에 나는, 비슷한 고민을 극복했던 어떤 롤모델 혹은 어떤 선배의 이야기를 해준다.
시계를 보니 1시. 학생을 내보내고 2시 수업을 준비한다. 수업자료는 이미 만들어뒀다. 함께 감상할 영상들을 불필요한 시간 낭비 없이 볼 수 있게끔 타이밍을 맞춘다.


2시. ‘캐릭터와 플롯’ 수업을 시작한다. 출석을 부르고 지난시간에 배운 것들을 간략히 점검한 다음, 오늘의 수업에 대해 맛을 보인다. 기승전결의 起 부분이다. 承에서 轉으로 넘어갈 때쯤 10분 동안 휴식시간을 가지고 結에서 강의 요점을 정리해준다.


3시간의 열강으로 노곤한 심신을 한 편의 영화로 달래야겠다고 생각하고 DVD로 2000년도 헐리우드 영화 ‘인사이더’를 본다. 러닝타임 2시간 반 동안 나는 두 미국남자에게 감정이입해 법정과 방송국과 미국 중산층 가정의 거실과 은밀한 침대까지를 정신없이 오간다.


퇴근하는 차 안, 이번에는 두 명의 MC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수다를 들으며 귀가한다. 집까지는 딱 10분. 결말이 무지 궁금하지만, 배가 고파서 그냥 라디오를 끄고 집으로 간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앞만 바라보고 있기는 심심해, 층간소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주저리주저리 써서 누군가 붙여 놓은 A4 용지를 열심히 읽는다.
저녁을 먹고 내가 또 다시 페이스북 등등을 훑어보는 동안, 아이는 게임이라는 가상현실의 세계로 진입한다. 아이와 나는 손가락과 뇌의 협업을 통해 우리 집을 떠나 다른 시공간을 자유로이 부유한다. 그러다 먼저 정신을 차린 내가 아이를 가상현실의 세계에서 빼내와 현실의 숙제를 상기시킨다. 나도 오늘밤에 완수해야 할 현실의 숙제가 있다. 내일 라디오에서 소개할 동화책 한 권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두어 시간, 의인화된 동물들이 살아가는 판타지의 세계에 빠져 있다 얼굴을 드니, 눈앞의 토끼 인형이 방긋 웃는 것 같다. 고개를 흔들어 현실감각을 되찾고 시계를 본다. 벌써 11시 반. 세수를 하고 이를 닦으면서 오늘 편집자에게 줄거리를 보낸 동화의 주인공을 생각한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서 오늘 밤 꿈에 벽란도 거상의 철부지 딸이 나오기를 간절히 빈다.
기도가 통했던지, 그녀가 꿈속에 나타난다. 말하고 웃고 울고 모험하고 성장한다. 아, 꿈을 고스란히 기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속에서도 나는 아쉬워한다.

□ 다음 호 필자는 이진로 영산대 교수입니다.



박정애 강원대·스토리텔링학과

필자는 1998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했다. 장편소설 『물의 말』로 2001년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에덴의 서쪽』, 『강빈, 새로운 조선을 꿈꾸는 여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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