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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유령’
‘디지털 유령’
  • 교수신문
  • 승인 2014.04.01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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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레이더


“투명사회는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통제사회다.” 매우 낯익은 이 말은 독일 베를린 예술대에 재직하고 있는 在獨 학자 한병철 교수가 그의 신간 『투명사회』(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35쪽, 12,000원)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한 교수는 고려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문학, 가톨릭 신학 등을 공부했다. 1994년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에는 스위스 바젤대에서 데리다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2010년 독일에서 출간한 『피로사회』가 국내에 번역된 것은 2012년. 이 해에 그는 『투명사회』를 독일에서 출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이 두 권의 책으로 ‘가장 주목받는 문화비평가’로 떠올랐다.

그는 신작 『투명사회』에서 디지털시대의 풍경을 읽어내면서, 그것을 ‘투명성’으로 풀어냈다. 그는 한국어판 서문에 이렇게 썼다. “투명성은 이데올로기다.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러하듯이 투명성의 이데올로기 또한 긍정적인 핵심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핵심이 신화화되고 절대화된다는 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이 있다. 전제적 지배자가 된 투명성은 테러가 된다.” 과연 어떻게 그런 문화적 독법이 가능할까. 「디지털 유령」의 일부를 발췌해 그의 사유를 더듬어본다(본문 고딕은 저자 강조).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는 돌을 점점 더 빛나게 해온 역사로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를 광속으로 보내는 광학 매체의 등장이 마침내 커뮤니케이션의 석기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다. 실리콘조차 조약돌을 의미하는 라틴어 silex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이데거의 저작에서도 돌이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단순한 사물’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돌은 가시성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어떤 것이다. 하이데거는 초기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하나의 단순한 사물, 하나의 돌은 속에 빛이 없다.” 그리고 십년 뒤에 발표된 예술작품에 관한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돌은 내리누르며 자신의 무게를 선포한다. 그러나 돌의 무게는 우리를 향해 압박하면서도, 자기 속으로 그 어떤 것도 침투하지 못하게 한다.” 사물로서의 돌은 투명성의 반대 형상이다. 돌은 땅에, 대지의 질서에 속하며 숨겨진 것, 닫혀 있는 것을 상징한다. 오늘날 사물은 날로 중요성을 잃어간다. 사물은 정보에 예속된다. 정보는 유령에 새로운 양분이 된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구체적인 것은 사물이 아니라 정보다. 우리의 환경은 눈에 띄게 연성화되고 안개처럼 흐릿해지고, 유령 같아진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유령 같을 뿐만 아니라 바이러스적 특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것은 즉각적인 감정의 차원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전염성이 있다. 전염은 사실 아무 읽을거리도 생각거리도 전해주지 않는 포스트해석학적 커뮤니케이션이다. 전염은 쉽게 가속화되지 않는 읽기를 전제하지 않는다. 어떤 정보, 혹은 콘텐츠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인데도 인터넷에서 유행병처럼 미친 듯이 퍼져 나간다. 여기에 의미의 무게는 없다. 어떤 다른 매체도 이런 바이러스성 전염력을 지니지 못한다. 글이라는 매체는 그러기엔 너무나 게으르다.
돌과 벽이 그러하듯이, 비밀도 대지의 질서에 속한다. 비밀은 정보의 가속화된 생산 및 확산과 잘 화합하지 못한다. 비밀은 커뮤니케이션의 반대 형상이다. 디지털의 토폴로지는 평평하고 매끄러우며 열려 있는 공간으로 이뤄진다. 반면 비밀은 깊이 파인 홈, 지하감옥, 은신처, 구덩이, 문턱과 같이 정보의 확산을 가로막는 장치가 많은 공간을 좋아한다.


비밀은 고요함을 사랑한다. 비밀스러움은 그 점에서 유령의 특징에 속하지 않는다. 유령적인 것(das Spektrale)은 스펙터클(das Spektakle)처럼 봄과 보임에 의존한다. 이 때문에 유령은 시끄럽다. 오늘날 우리의 집에 불어대는 디지털 바람에는 유령의 기운이 있다. “어쨌든 유목민에게 바람은 정착민의 땅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 거기엔 뭔가 유령의 기운이 감돈다. (……) 유령처럼 잡히지 않는 바람, 유목민을 앞으로 몰아가는 바람, 유목민을 부르고 따르게 하는 바람. 우리에게는 계산과 수치로 표현할 수 있는 경험이 그런 것이 됐다.” 디지털적인 것은 고도의 복합성으로 인해 유령 같아지고,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반면 복합성은 비밀의 특성이 아니다.


투명사회에도 이면이 있다. 투명사회란 어떤 의미에서 표면적 현상이다. 투명사회의 뒤편, 또는 그 아래에서, 그 투명성을 벗어나는 유령들의 공간이 생겨난다. 이를테면 다크풀(Dark Pool)은 익명의 금융상품 거래를 뜻한다. 금융시장에서 이뤄지는 이른바 고속 거래는 결국 유령과의 거래, 또는 유령 사이의 거래다. 서로 커뮤니케이션하고 전쟁을 치르는 것은 알고리듬과 기계들이다. 이처럼 유령 같은 거래와 커뮤니케이션 형식은, 카프카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인간의 힘을 벗어나’ 버린다. 그것은 결국 플래시 크래시(Flash Crash)처럼 예측 불가능한 유령 같은 사건을 촉발한다. 오늘의 금융시장은 너무나 복잡해서 전혀 통제받지 않은 채 출몰하는 괴물들을 부화하기도 한다. 완전히 익명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토어(Tor)라는 지하 네트워크도 등장했다. 그것은 가시성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디지털 심해다. 투명성의 증가와 함께 암흑도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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