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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읽기를 권장함
누워서 읽기를 권장함
  • 교수신문
  • 승인 2014.03.25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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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중국 古書는 우리나라 고서에 비해 크기가 작다. 일찍부터 상업출판이 발달한 중국 출판문화의 특수성 때문이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 출판업자에게 출판비 절감은 절실한 과제였다. 이노우에 스스무(井上進)의 『중국출판문화사』에 따르면 南宋 官刻本의 책값에서 종이값이 차지하는 비율은 절반 이상에 달했다. 따라서 출판비를 줄이려면 무엇보다 종이를 아껴야 한다.


종이를 아끼려면 우선 책 크기를 줄여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작으면 읽기가 불편하니, 경제성과 가독성 사이에서 접점을 찾아야 한다. 현전하는 중국 고서의 크기가 바로 그 결과이다. 크기만 작은 게 아니라 두께도 얇다. 장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저렴한 종이를 사용해서이다. 그것도 모자라 재활용을 위해 각 章 말미의 여백까지 오려내는 치밀함을 보인다. 마지막 장에서 글자만 남기고 여백을 오려낸 중국 고서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민간업자가 출판한 조선후기 坊刻本은 중국 고서와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하지만 정부가 출판한 官板本은 다르다. 관판본 고서의 크기는 B4 용지에 근접한다. 글자 하나의 크기가 2센티미터에 달하니, 필요 이상으로 크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종이도 두껍고 빳빳하니, 여차하면 다용도로 전환이 가능하다. 여백도 유난히 넓다. 종이 좀 아끼겠다고 구차하게 여백을 잘라내는 일도 없다. 관판본 고서에서는 경제성에 대한 고려를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도 그렇지만 정부는 출판비를 걱정하지 않는다. 책이 안 팔린다고 덜 찍을 이유도 없고, 책이 잘 팔린다고 더 찍을 필요도 없다. 관계자들에게 배포하고 유관 기관에 몇 부 비치하면 그만이니, 비용 절감은 절실한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책을 내지 않을지언정, 기왕 책을 낸다면 가급적 많은 비용을 지출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배정된 예산을 소진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크고 화려한 장정의 책을 출판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우리 고서의 엄청난 크기는 필시 이와 같은 관 주도의 출판문화가 배태한 현상이리라.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식자층의 과시욕도 무시할 수 없고, 출판시장의 규모도 고려해야 한다. 페이퍼백을 포기하고 양장본만 줄기차게 찍어내는 오늘날 출판업계의 현실은 과거에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우리 고서는 유난히 크고 무겁다.


크고 무거운 책을 읽으려면 정좌한 자세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만약 누워서 읽기라도 한다면 손목이 저려오면서 거대한 책장이 얼굴을 덮칠 것이다. 그런데 17세기 이래 작고 가벼운 중국 서적이 대량 수입되면서 독서 자세에 변화가 일어난다. 누워서 읽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正祖가 文體反正을 단행하며 중국 서적의 수입을 금지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사대부 집안의 자제라면 책을 책상 위에 반듯이 올려놓고 똑바로 앉아 읽어야 하는데, 게으른 버릇이 생겨 누워서 보기를 좋아한다. 중국책은 누워서 보기 편하지만 우리나라 책은 불편하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중국책을 찾는데, 성현의 경전까지도 누워서 보는 사람이 많으니, 사대부의 풍습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중국책의 수입을 엄격히 금지한 것은 이런 게으른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弘齋全書』「日得錄」


정조가 금수 조치를 단행한 근본적인 목적이 불온한 사상의 유입을 차단하는 데 있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정조의 금수 조치에는 이단적 사상서와 稗官雜記는 물론, 조선에서 정상적으로 출판, 유통되는 서적까지 포함됐다. 누워서 볼 우려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정조는 같은 이유로 책 놓는 부분이 비스듬하게 만들어진 책상의 사용도 금지했다. 거룩하신 성인의 말씀이 실려 있는 경전을 감히 누워서 보다니, 만민의 군주이자 스승인 君師를 자임한 정조로서는 불쾌했을 법도 하다. 하지만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책의 크기는 독서 자세를 좌우하고, 독서 자세는 텍스트의 수용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책이 聖人의 現身이라도 되는 양 무릎을 꿇고 공손한 자세로 읽는다면, 텍스트에 비판을 제기하거나 회의를 품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누워서 읽기를 금지하겠다는 것은 비판적 독서를 금지하겠다는 것이다. 비판은 금지, 수용만 가능. 이것이 누워서 읽지 말라는 명령의 본질이다. 텍스트에 대한 비판 능력은 독서의 질을 결정한다. 걸핏하면 대학생의 독서량이 입방아에 오르내리지만, 정작 아쉬운 것은 독서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비판적 독서의 실종은 수용 일변도의 학습 경험과 텍스트의 권위에 대한 강요가 빚어낸 현상이다. 책의 권위에 압도당하면 비판적 독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필자는 누워서 읽기를 권장한다. 책의 권위에 저항하라는 말이다. 저항을 용납하지 않으면 결과는 외면뿐이다. 책의 권위를 움켜쥔 채 책을 외면하는 세태를 탓할 수는 없다.



장유승 서평위원/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한국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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