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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인의 몸은 어떻게 특별한 곳이 됐을까?
근대인의 몸은 어떻게 특별한 곳이 됐을까?
  • 교수신문
  • 승인 2014.03.1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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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신간_ 『몸의 역사·1-르네상스부터 계몽주의 시대까지』 조르주 비가렐로 외 지음, 주명철 옮김, 도서출판 길, 2014.03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의 귀족 루이지 코르나로는 1558년 ‘오래 살려면 지켜야 할 충고’를 남겼다. 먹을거리와 마실거리에 주의를 기울이던 그의 소박한 충고는 몇백 년 동안 내려온 자기관리 지침을 되뇌는 듯하다. 그는 음식을 적당히 먹고, 장을 비우고 체액을 맑게 하며, 우주와 기후의 영향력을 존중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 충고의 독창성은 어떤 확신에서 나왔다. 연금술사와 점성술사들이 ‘옛날부터 해오던’ 실천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주 혹독하게 비판했다. 값진 물질이나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별을 몸의 관리와 연결하는 불가해한 관습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정화된 금속을 삼켜서 육체적 부패를 멀리하려는 시도, 금이나 은의 용액에 기대어 육체의 분해를 막아내려는 시도를 마술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발명이 성공한 사례를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코르나로는 중세의 기준에서 멀리 벗어났다. 물질 사이의 은밀한 교류는 사라졌다. 수정·금·진주는 투명성이나 순수함을 전하지 못하고, 별들은 사람을 보호하거나 뒷받침해주니 못했다. 베네치아 귀족의 계율은 이처럼 자발적인 환멸에서 나왔다.


이 책에서는 이처럼 ‘근대의’ 몸이 출현하는 데 먼저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근대인은 그 몸이 행성의 영향, 부적이나 값진 물건에서 나오는 신비스러운 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장치를 갖고 있다고 상상했다. 이 몸은 ‘환상에서 깨어나는’ 기능을 한다고 봤다. 이제 사람들은 육체를 새롭게 보고, 그 기능을 인과율로써 설명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간의약과 시골의 마법사 그리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존재가 구부려놓은 몸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몸은 그 자체의 ‘추진력’과 그 자신의 힘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능을 한다고 규정하면서 몸을 개별화하는 문화가 생겨 옛 문화와 충돌했다.


겉모습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다듬어내는 순간에 나온 그림은 그만큼 더욱 돋보인다. 1340년 시모네 마르티니가 그린 「예수의 수난」에 나오는 인물들은 羅沙 옷에 파묻혀 있었지만, 1456년 만테냐가 그린 「예수의 십자가형」에 나오는 인물들은 사뭇 다르다. 만테냐는 윤곽이 돋보이도록 옷을 입혔기 때문이다. 이들은 ‘몸의 발명’을 드러내 보여줬다. 아름다움은 갑자기 견실성과 직접성을 얻으면서 더욱 좋아졌다. 마사초는 1420년경 최초로 육신의 존재를 복원하는 새로운 방법, 물리적 질량, 색깔, 모가 나거나 둥근 형태의 두께를 다루는 방법을 생각했다. 이제 아름다움은 근대성에 포함됐다. 르네상스 시대에 일어난 변화는 단지 ‘구상적 사고의 변화’일 뿐이었다. 그것은 15세기 토스카나 지방에서 몸을 그릴 때 갑작스럽게 나타난 형태적 사실주의로, 그림 속에서 사람들의 몸가짐을 예리하게 그리는 방법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근대에는 자아의 경계선, 자극과 욕망을 강도 높게 연구했다. 예절과 사교성의 통제, 폭력성을 갈고 닦기, 내밀한 세계에서 몸짓을 자가통제하는 문제가 연구과제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시 한 번, 몸의 표현 전체가 통일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장-루이 플랑드랭이 묘사했듯이, 농촌 세계에서 충동과 직접성과 갑작스러움을 드러내는 사랑의 몸짓은 궁정 예식에서 지킨 좀 더 세련된 존경의 몸짓과 거리가 멀었다. 육체적 거동은 부챗살처럼 갈라진 사회 전체에 고루 등록돼 있었기 때문에 극과 극의 차이를 보여줬다. 어떤 형태의 몸이건, 이제부터 몸이 아주 새롭게 등장했다. 이렇게 해서 삼가는 태도가 경계선을 만들고, ‘판단하고’ 내면화하는 정신적인 영역이 상상적으로 지지하는 곳까지 자가통제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게 됐다.


사실 르네상스 시대부터 계몽주의 시대까지 몸에 정신을 집중한 결과 오늘날의 관점을 낳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두 가지 긴장이 생겼다. 하나는 집단적 강제가 드세졌다는 점, 또 하나는 개인의 해방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첫 번째 경우, 1750년 이후 공중이 인구의 힘을 새롭게 자각하면서 ‘공간을 개량하기’, ‘공간을 풍요롭게 만들기’, ‘공간을 보존하기’라는 과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노동인구와 수명·건강의 문제가 공동체의 관심사항이 됐다. 두 번째의 경우, 개인의 감수성이 승리했다. 자아의 등장이 더 높은 가치를 얻지 못했다 해도 좀 더 정당성을 얻게 됐다. 파리의 상류층의 유산목록에 개인 초상화가 흔하게 나타나는 점이 이미 이를 증명한다. 초상화의 내용도 개인적이고 사적인 표시를 더 많이 담으면서 전보다 덜 엄숙해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근대인의 몸은 해방과 함께 복종이라는 두 가지 역동적요소가 뒤섞인 특별한 곳이 됐다는 점이 두드러진 특징이라 하겠다.

조르주 비가렐로
이 책의 책임편집을 맡은 조르주 비가렐로는 파리5대학의 사회역사학 교수로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학제간연구센터(CETSAH) 공동소장과 프랑스국립도서관 과학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위생’과 ‘몸’에 관련된 사회적 태도의 역사에 대한 많은 연구를 했다. 또한 개인의 몸과 근대 정치의 연관에 천착한 미셸 푸코의 연구에도 큰 영향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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