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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
  • 오은영 한국외국어대·영문학과
  • 승인 2014.03.17 1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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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에 영국의 소설가 로렌스(D. H. Lawrence)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같은 야한 소설을 써서 당시의 점잖은 분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했다. 그런데 이 작가의 야함은 포르노와는 사뭇 차원이 다른 것으로, 정신과 몸을 이분법적으로 나눠 사고했던 서구 형이상학전통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 할 만하다. 그가 했던 여러 주장들 중에서 요즘 나에게 인상적인 대목은 현대인을 ‘산송장’이라 일갈하는 그의 독설이다. 현대문명에 대한 그의 진단에 따르면, 인간을 이성의 동물로 만물의 영장으로 치켜세우면서 우리의 몸을 천대하고 무시해온 근대의 경험이 우리의 모든 감각적 기능을 마비시켰고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남은 것은 추상화된 관념의 세계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의 영역에서 우리의 감각이 왜 중요할까.


인간의 감각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현대생활에서 압도적인 감각은 당연 ‘시각’이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수많은 이미지들과 대중매체의 홍수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가장 쉽게 현혹되기도 하고 상대방에 대해 편견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눈이다. 로렌스는 그의 많은 소설 속에서 이러한 시각을 차단시키고 인물들을 완전한 어둠 속에 놓아둔다. 어둠 속에서 인간에게 가능한 감각은 시각외의 나머지 소외된 감각들이고, 이러한 소외된 감각들이 되살아나면서 인간의 몸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대도시의 삶은 인간이 완전한 어둠을 경험할 수 없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대도시의 경험이 인간의 감각에서도 시각외의 감각은 도통 활용해 볼 기회조차 없게 만든다. 나의 생활에서 내가 시각이외의 감각을 써보는 경우는, 햇볕 좋은 봄이나 가을날 어쩌다 산책을 하는 때뿐인 것 같다. 그때서야 겨우 햇볕을 느끼고 바람을 느껴본다고 할까. 몸을 쓸 일은 점점 더 없어지고 매일 머리만 굴리고 있다. 감각이 죽고 몸이 죽으니 산송장이라 할 만하다.


몇 년 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본 어떤 프로그램에서 젊은 시절 전문산악인으로 히말라야의 높은 산들을 누비고 다녔던 여자 분이 소개된 적이 있다. 높은 산을 오를 때는 정상을 정복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으므로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나이 들어 아들과 지리산 자락에 정착한 그 분은 매일 뒷산인 지리산 자락을 오르면서 비로소 나무와 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툇마루에 앉아 평화롭게 차를 마시면서 ‘지금의 삶이 훨씬 행복하다’고 얘기하는 화면을 보는 순간, ‘아! 정말 행복하겠다’라는 감탄이 나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지리산 자락에 깃든 그녀의 삶은 인간의 모든 감각과 감성들이 골고루 살아날 것 같은, 사실 도시인들이 모두 소망하는, 그런 삶이다.


도시의 삶은 우리 몸의 감각을 현저히 퇴화시킨다.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 우리 일상의 거의 전부이고 퇴근해서는 경쟁에 지친 머리를 식히느라 멍하니 텔레비전이나 들여다보는 것이 대부분이다. 로렌스는 이미 백 년 전에 인간들이 산송장이나 진배없다고 절망적으로 얘기했으나, 현재 우리의 모습을 그가 본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 서양이나 동양이나 어머니들의 오랜 소망은 당신의 딸들이 ‘손에 물 묻히지 않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몸을 놀리지 않고 노동을 하지 않게 되면 온전한 인간으로 살기가 어렵다. 정신과 몸이 사실 균형 있게 쓰여야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는데 요즘 우리나라에서 선호하는 전문직들의 대부분은 무조건 머리만 쓰라고 강요한다.


나의 지인 중에는 한 학기가 끝나면 간단한 짐을 꾸려서 혼자 산 속으로 들어가 며칠 지내다 오시는 분이 있다. 시설이 제대로 갖춰진 캠핑장이 아니고 그냥 산 속이다. 그곳에 들어가서 해가 뜨면 밥해먹고 책도 좀 보고 산책도 하고 그러다 밤이 되면 잠을 자는 단순한 생활을 며칠하다 보면 한 학기동안 쌓였던 피로가 좀 가시는 것 같다고 하셨다. 또 다른 분은 방학 때마다 국내든 국외든 2~3주 동안 혼자 걷는 여행을 꼭 해야만 한 학기를 버틸 힘을 얻는다고 하신 선생님도 있다. 이분들의 전공이 모두 인문학이라 현실과의 타협이 좀 더 어려운 부분이 있겠지만, 우리가 느끼는 답답함과 피로는 인문학 전공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몸의 감각이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생생히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고 그래야만 진짜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박경리 선생님은 『토지』를 쓴 소설가로 유명하지만 그분이 당신의 외로운 삶을 ‘꿈’같다고 노래하신 시가 있다. 지금은 ‘박경리 토지 문학관’으로 조성된 이층집과 너른 정원은 그 분이 혼자 외로움과 글쓰기의 고통을 이겨내며 『토지』를 집필하신 공간이다. 그 집에서 당신의 삶이 꿈같기도 하고 저승길을 오가는 것 같기도 하다고 하시면서, 선생님은 그래도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글을 쓸 때라고 하셨다.

글을 쓸 때는 살아있다
바느질할 때 살아 있다
풀을 뽑고 씨앗을 뿌릴 때
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
서쪽에서
빛살이 들어오는 주방
혼자 밥을 먹는 적막에서
나는 내가 죽어 있는 것을 깨닫는다

―「꿈」, 박경리

수업시간에 리얼(real)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학생들과 이야기하다가 토지문학관에서 봤던 이 시가 생각나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리얼’하게 느낀다는 것은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의미와 비슷하다고, 여러분은 언제 자신이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느끼는지 물었다. 입시에 맞춰 죽어라 문제집만 풀다가 대학에 와서 취직 걱정으로 불안한 학생들에게 물을 질문은 아닐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공부가 좋아서 평생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에게 대학평가의 지표만을 들이대는 대학의 현실에서 살아남아야하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당신에게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라고 물을 수 있겠는가? 나는 요즘 매일 자신에게 묻는다. 산송장이나 괴물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면서 과연 나는 무사히 정년을 맞을 수 있을까?

□ 다음호 필자는 김양선 한림대 교수입니다.



오은영 한국외국어대·영문학과
필자는 툴사대에서 로렌스(D. H. Lawrence)로 박사논문을 썼고 대학에서 영국소설을 가르치고 있다. 「로렌스의 여행기 문학과 탈식민주의」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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