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3:55 (금)
“‘近代’의 무게 실감한 시간들… 아카이브 구축 더 늦출 수 없다”
“‘近代’의 무게 실감한 시간들… 아카이브 구축 더 늦출 수 없다”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4.03.17 14: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반년간지 <근대서지>8호 펴낸 전경수 근대서지학회장

세월의 흔적이 풀풀 풍겨나는 옛 잡지, 고서적, 사진들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것도 취미 수준을 넘어서서 전문적인 연구 네트워크까지 형성했다. 2009년 출범한 근대서지학회(회장 전경수, 서울대·인류학과)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근대서지학회는 1947년에 출범한 한국서지학회에 비해 역사가 짧다. 또 한국서지학회가 한적 중심의 모든 판본, 고문서를 연구한다면 근대서지학회는 근대 인쇄술이 들어와 양장본이 간행된 시기부터 6·25까지의 사료를 다룬다. 요코하마 인쇄소가 한불자전을 펴낸 1880년이 그 시작점이다.

근대서지학회가 여타 학회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지점은 바로 학회를 구성하는 주체가 수집가, 연구자, 출판사, 유가족, 이렇게 네 집단으로 돼 있다는 것이다. 주축은 수집가와 연구자지만 유가족을 통해 사진, 미발표 원고를 찾게 되면서 자연스레 네 집단이 연대하게 된 것이다.

근대서지학회가 시작한 작업은 <근대서지> 발행이었다. 800페이지가 넘는 연구서를 반년간지로 발행하기 위해 연 1회 학술회의도 개최했다. 지난달 8호가 나왔다. 옛 자료들을 ‘발굴’해 연구한 성과들을 모은 <근대서지> 8호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풍성함이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다. 1920년대 소화집『우슴거리』를 찾아냈고, 구보 박태원의 시, 소설 각 1편과 정비석의 작품도 찾았다. 희곡 분야에서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던 잡지였던 <여성지우>에서 김영팔의 작품을 찾아냈으며, 한국전쟁기 정훈매체인 <갈매기> 1, 3호를 발굴해 권말에 영인까지 했다.

근대서지학회 초대 회장부터 두 번 연임해 3代회장직을 맡고 있는 전경수 서울대 교수(문화인류학과)는 “원천 소스 확보가 중요하다. 미래를 비춰주는 것이 과거고, 과거가 미래의 거울이다. 근대를 정리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못 나간다. 砂上樓閣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近代’에 주목한 것일까. 초대 회장부터 두 번 연임해 3代 회장직을 맡고 있는 전경수 교수가 다소 심각하게 얘기를 꺼낸다. “사실 우리는 근대도 정리가 안 된 상태에요. 위안부 문제도 그렇고, 고종 시기의 문제들이나 독도 문제도 그렇죠. 대한제국이 칙령으로 했다지만 정리가 안 돼 있는 상태로 지금까지 온 거예요. 현대사 문제로 많이 시끄러운데, 근대를 정리하지 않고 어떻게 현대사를 바로 쓸 수 있나요? 어쩌면 우리 학계는 ‘근대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벗어던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전경수 회장의 전공이 근대서지학회랑은 조금은 이질적이다. 서지학이 워낙 고서적들을 다루는 분야다보니 수집가들도 문학 작품 수집에 열을 올리고, 연구자 층도 국문학자들이 큰 폭을 형성하는데, 전 교수는 문화인류학 연구자 아닌가. “근대서지학이라고 해서 어떤 개념 규정을 한 것은 아니에요. 인류학사를 정리하고 학문사를 연구하다보니, 국내 학제를 구성하는 학문분야가 모두 일제강점기에 수입돼 안착된 것이고, 지금도 큰 변동이 없다는 것이 보였죠. 일제강점기에 학문이 정착한 과정에 대해 정면 돌파하지 않으면 어떤 학문분야도 學文史를 쓸 수 없어요.”

근대서지학회에서 학문사 연구자로는 그가 유일하다. 중국, 일본도 자국 인류학사를 쓰지 못했는데, 유일하게 그만이『한국인류학 백년』(일지사, 1999)을 펴냈다. 일본에서 4쇄를 돌파했고, 중국어로도 번역중이다. 그는 어떤 연유로 그는 근대서지학회와 인연을 맺었을까. “민속학자이신 송석하, 손진태 선생의 자료를 찾다보니 이 자료들이 澗松 전형필 선생에게 넘어간 걸 알게 됐죠. 자료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서지학자인 오영식 선생을 만났고, 어마어마한 소장 자료에 놀랐습니다.”

<근대서지>의 편집위원장인 오영식 보성고 교사는 전 회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수지’같은 존재다. 오영식 편집위원장이 1975년부터 모은 방대한 사료는 연구자들에게 알음알음 퍼져 나갔고 이후 사진, 인쇄소, 잡지 삽화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는 젊은 연구자들을 속속 끌어 모으는‘저수지’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질적인 네 집단을 보듬어 ‘융합’적으로 근대서지학회를 이끌고 있는 전 회장은 큰 소리 날 때마다 현장을 찾아 그저 이야기를 들으며 일을 해결하는 스타일이다. “먹물들만 해서는 될 일들이 아닙니다. 수집가가 없어서도, 유가족이 없어서도 안 되죠. 마찬가지로 출판사가 없으면 <근대서지>도 발행할 수 없고요.”

근대서지학회에는 외부 지원이 전무하다. 전경수 회장이 주머니를 털어 행사를 챙기고,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세미나 등 모임마다 장소와 경비를 후원한다. <근대서지> 발행은 소명출판 박성모 사장이 맡았다. 박 사장은 <근대서지>의 기본취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소장자들이 움켜쥐고 있는 자료를 공개하자는 겁니다. 唯一本을 가진 수집가들이 흔쾌히 자료를 제공하면 그걸 연구하는 학자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속도의 시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근대의 사료’들은 어떤 의미일까. 전 회장은 다시 한 번 ‘근대’를 강조한다. “근대 문제 해결 없이는 현대를 논할 수 없어요. 원점인 겁니다. 더군다나 식민지 시대 연구 논문을 보면 누구 하나 인용한 것을 그 이후로 계속해서 인용하는데, 오류 계보들이 엄청나요. 해방 후나 6·25 직후 정리해 둔 것을 지금 찾아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학문 분야별로 그때 해 둔 것들 자료를 찾아서 재조사해야 합니다.” 그는인류학 연구과정을 빌려 덧붙인다. “학계에 인정받는 한국정치학사, 한국사회학사, 한국경제학사가 있습니까? 돈 되는 것만 쫓아다니는 형국이죠. 원천 소스 확보가 중요합니다. 미래를 비춰주는 것이 과거고, 과거가 미래의 거울입니다. 이거 정리 안 하고는 한 발짝도 못나갑니다. 砂上樓閣입니다.”

그렇다면 디지털 시대를 맞은 서지학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전 회장은 그 해답을 ‘아카이브’에서 찾았다. “지금까지는 개인 연구자가 관심분야 자료를 찾아 연구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연구자의 관심사에 따라 주관적 시각이 반영될 위험성도 있죠. 도서관 없는 곳은 없어요. 하지만 아카이브가 없으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결과만 알 뿐 과정을 알 수 없어 계속해서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워싱턴 D.C.에 있는 내셔널 아카이브(국가공문서보관소)를 그 모델로 꼽았다. 지난달 한 달간 방문하는 동안 그는 이곳에서 남북전쟁에 참전한 조상의 흔적을 찾는 60대 미국인부터, 프랑스·독일·헝가리 연구자까지 자유롭게 원문을 찾아보던 광경을 인상 깊게 봤다고 털어놓았다.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 6·25라는 두 개의 큰 역사적 굴절. 전 회장은 소용돌이로 다가왔던 근대를 분석하고 해체하는 자생력을 갖출 것, 그 다음으로 우리와 유사한 근대 경험을 한 이웃들과 이를 공유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의 근대경험을 타자화했던 주체와 정면으로 대질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포스트모던’은 이때 새롭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근대’라는 지독히도 타자화된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 때가 근대서지학회의 당당한 해체의 날이라고 말하는 전경수 회장. 근대서지학회의 묵묵한 활동을 응원한다.


글·사진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