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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백지
마음의 백지
  • 교수신문
  • 승인 2014.03.11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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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릴레이 에세이


이 글은 신문수 서울대 교수의 산문집 『풍경 혹은 마음의 풍경』(지오북, 2014.2)에 수록된 것으로,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재수록 한 散文이다.
『풍경 혹은 마음의 풍경』에서 저자는 “등 뒤로 흘려보낸 세월의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삶은 반듯하기보다는 우여곡절의 에움길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그저 지그재그로 휘도는 정도가 아니라 움푹 패어 있기도 하고 끊기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자취가 묘연해져서 당황하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호주머니에 메모장을 지니고 다니다가 이것저것 기록해두는 버릇을 갖게 된 것은 이런 난경을 벗어나고자 하는 안간힘이었다”라고 말한다. 그의 散文은 이런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難境을 마주한 ‘안간힘’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월든』과 같은 자연에 대한 웅숭한 교감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또 말한다. “변전하는 삶의 순간순간 내 마음의 풍경을 구성하는 기억들은 내 삶의 자취이면서 또한 사라져 가는 내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새삼 느끼는 것은 기억의 거울이란 평명한 것이 아니라 울퉁불퉁하고 때로는 칠이 벗겨져 불투명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에세이를 쓰는 행위가 삶의 혼란을 다스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그의 말대로, 그의 산문집 『풍경 혹은 마음의 풍경』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學人들이 반짝거리는 언어의 그물로 걷어 올린 담백한 내면풍경에 해당될 것이다.
신문수 교수는 하와이대에서 박사학위를 했으며, 한국영어영문학회 회장, 한국문학과환경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지금은 생태문화연구회를 이끌면서 생태문화연구의 정립을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타자의 초상』, 『미국의 자연관 변천과 생태의식』(편저), 『문학 속의 언어학』(역서) 등이 있다.
신문수 교수는 ‘추천 릴레이 에세이’ 다음호 필자로 오은영 한국외국어대 교수를 추천했다.

금년 겨울은 눈이 유난히도 많이 내렸다. 며칠 전 동해안 쪽에 폭설이 내려 아이들 키 높이로 눈이 쌓였다는 뉴스를 듣고 홀연 그곳 설경이 보고 싶어서 길을 나섰다. 경춘고속도로를 타고 홍천에서 나와 인제를 거쳐 미시령 고개를 넘었다. 날씨는 언제 눈이 내렸나 싶게 맑고 따뜻했다. 미시령 터널을 빠져나오자 흰 눈에 덮인 골짜기가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오른편으로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울산바위의 화강암 연봉이 비껴선 햇살 속에서 눈이 시리게 검푸르다.


그러나 정작 흰 눈으로 뒤덮인 설원의 아득함을 맛보게 해준 곳은 낙산사 경내였다. 몇 해 전 산불로 소실된 후 새로 조성된 낙산사의 널따란 구내는 사람들의 발길이 멎은 덕분에 순백의 설원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무릎까지 차오른 눈이 어설픈 인공의 흔적을 감쪽같이 파묻어버린 데다가 헐벗은 몇 그루의 고목과 사이사이 석축이 만들어낸 적막감으로 눈 덮인 경내는 숭엄함 그 자체였다. 빗살처럼 퍼져 나가는 설원의 은은한 반사광은 투명한 하늘을 되비추며 아득한 시원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었다.


선방의 툇마루에 앉아 이 고요한 눈 풍경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 마음도 어느새 하얀 백지가 돼버린 기분이다. 흰 색깔 대문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뒤덮은 刷掃 효과 때문인가? 앞뜰에 서 있는 헐벗은 감나무 가지에 아직 외롭게 걸려 있는 빨간 홍시 하나와 그 너머 청잣빛 하늘, 그리고 그 아래로 맞닿은 짙푸른 바다 풍경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면서 나는 문득 사람들이 눈 덮인 정경에 이끌리는 까닭이 궁금해졌다.


사람은 누구나 눈과 연관된 한두 가지의 인상쯤은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을 것 같다. 친구들과 뛰놀던 학교 운동장에 펑펑 쏟아지던 함박눈, 토요일 오후, 호젓한 도시의 돌담길에 떨어지자마자 솜사탕처럼 녹아버리던 포근한 눈, 바닷바람을 타고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외진 해변 길의 진눈깨비에 대한 인상이 떠오른다. 이런 정경들은 백설의 흰빛도 흰빛이지만 눈의 또 다른 물성, 곧 덧없이 사라지고, 포근하게 감싸고, 때로는 뼛속까지 오싹하게 만드는 한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렇게 절간을 적막한 설원으로 탈바꿈시키는 積雪, 전나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소담스러운 눈꽃, 혹은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뒤덮고 있는 정갈한 백설기 같은 눈은 그 고유한 흰색과 더불어 모든 것을 無로, 백지로 돌려버리는 소멸의 미학이 더 두드러진다.


근년에 들어서서 분분히 날리는 동적인 눈보다는 이런 정적인, 빛의 침묵에 감싸인 지상의 적설에 어쩐지 더 이끌린다. 그 매혹의 이면에는 해오던 일을 잠시 접어두고 기억마저 회칠한 후 그 자리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이 어른거리는 듯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출발선에 서고자 하는 과격한 부정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이미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고 발걸음이 무거워진 주제에 그것은 과분한 바람이다. 그 새로움이란 가령 별 볼일 없는 패가 들어온 화투판이나 패색 짙은 바둑판 앞에서 판을 새로 시작하고 싶은 정도의 것이다. 아니면 청소년기에 누구나 한 번쯤 사로잡혔을 유혹, 부모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어디론가 멀리 달아나고픈 그런 일탈의 욕망에 흡사한 것이다.


일본 다도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센노 리큐(千利休)는 어느 가을 아침 뜰에 수북이 쌓여 있는 낙엽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친 바 있어서 빗자루를 집어 들어 뜰을 깨끗이 쓸고 주워든 몇 닢의 낙엽을 드문드문 다시 뿌려 놓고 즐겼다고 한다. 등 뒤로 흘려보낸 세월이 적지 않은 나 같은 필부의 평범한 삶에서 새 출발이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뒤돌아보지 않는 비장한 시작이라기보다는 리큐의 기발한 착상처럼 있는 것들을 여기저기 재배치해보고 관습의 녹을 걷어내 일의 초발심을 되새겨보는 것에 가까운 것이리라. 공자가 말한 繪事後素가 시인 묵객의 전유물일 수만은 없을 터이다.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이따금씩 삶의 청사진을 새로 설계하고픈 욕심을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흰 눈이 내려 온 세상이 눈부신 설원으로 변할 때마다 눈의 염력을 빌어 내 마음을 깨끗한 백지로 만들고 그 위에 내 나름의 새로운 그림을 그려 보는 일을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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