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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조건’과 ‘철학적 고민’, 그 긴장의 극점
‘비참한 조건’과 ‘철학적 고민’, 그 긴장의 극점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03.11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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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_ 좌파들의 사유와 실험

▲ 『탈정치의 정치학』 워너 본펠드 엮음|안또니오 네그리 외 지음|김의연 옮김|갈무리|444쪽 | 22,000원 『좌파로 살다』 뉴레프트리뷰·프랜시스 헐먼 지음|유강은 옮김|사계절출판사|672쪽|35,000원
“우리는 참혹함으로 가득한 시대를 살고 있다. …… 모든 세대의 노동자들이 마치 잉여인간처럼 취급되고 있으며, 겉으로는 반대로 보이더라도 전쟁과 테러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자본주의가 [고작] 비참한 상황을 빚어내고 있다는 발상은 지극히 낙관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비참한 조건(Zusta¨nde)과 비참한 상황(Mißsta¨nde)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워너 본펠드 영국 요크대 정치학교 교수가 『탈정치의 정치학』 한국어판 서문에 쓴 글이다. 그는 이 비참한 상황이란 게 “박탈당한 자들에게 혜택을 부여하는 선의의 정치적 개입과 강령들을 통해 교정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사건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최근 송파구 세 모녀 자살 사건을 대입해보면 이 말은 쉽게 이해된다. 그들이 직면했던 ‘비참한 상황’은 과연 혜택, 선의 등에 의해서 교정될 수 있는 사회적 사건이기만 할까. 그렇다면 그건 보수적 시각일 게다. 이 책의 저자들이라면 ‘송파구 세 모녀 자살 사건’은 그 앞에도, 그 뒤에도 계속 이어질 수 있는 동어반복적인 사건이란 점에서 ‘상황’이 아니라 ‘비참한 조건’의 문제로 다가갈 때, 해법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1987년부터 1999년까지 간행됐던 <공통감각(Common Sense)>에 실렸던 논문들을 워너 본펠드 등이 엮어낸 Revolutionary Writing(Autonomedia, New York, 2003)을 번역한 『탈정치의 정치학』, 그리고 영국의 격월간 좌파 학술지 <뉴레프트리뷰>의 편집위원들이 루카치에서부터 조반니 아리기까지 16명의 문제적 인물을 인터뷰해 ‘집단초상화’를 그려낸 LIVES ON THE LEFT: A Group Portrait(Verso, 2011)을 우리말로 옮긴 『좌파로 살다』는 ‘비참한 조건’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오늘날 좌파적 사유의 얼개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두 극점으로 읽히기 충분하다.

자율주의 정치철학자들의 목소리
『탈정치의 정치학』의 저자들은 잘 알려진 자율주의 정치철학자들이다. 이들이 이 책에서 말하는 ‘탈정치’는, 지금까지 정치영역을 지배해온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라는 양가적 프레임을 비판하고 전복시켜 정치를 ‘공통적인 것’의 구성으로 새롭게 개념화하는 것으로, ‘공통적인 것’의 구성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모든 사회적 실천 행위들을 가리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공통적인 것’은 네그리·하트가 함께 쓴 『공통체』(정남영·윤영광 옮김, 사월의책, 2014)에 따르면, “개방적 접근과 집단적이고 민주적인 결정 및 자주관리로 정의되는 부의 형태”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탈정치의 정치학』은 왼쪽에서도 꽤나 더 나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치형태와 국가형태에 포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의 근거를 모색하는 자율주의 정치철학자들의 주장은 뭘까. 이들은 미완의 형태로 존재하는 다양한 삶의 자율공간들 속에 ‘언제나 이미’ 실재하는 전복적 잠재력에 눈을 돌리고 그러한 잠재력을 우리 자신의 힘으로 승인할 때에야 비로소 담대한 희망의 기획이 시작될 수 있다고 환기한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의 기본적인 형태성을 특징짓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정당성의 근거를 새롭게 부여하려는 하버마스와 루만의 시도를 비판한 아뇰리의 글 「파괴, 참혹한 시대를 사는 학자의 결단」은 논의의 선명성과 함께 그 비판 대상이 ‘하버마스와 루만’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홀러웨이는 두 편의 글 「태초에 절규가 있었다」, 「자본이 운동한다」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합법칙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돼온 가치·화폐·자본 범주에 대한 탈물신화를 통해 “가치법칙은 질서의 확립(가치‘법칙’)이자 가치의 무법칙성”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마이크 루크는 「철학에 반하는 혁명에서 자본에 반하는 혁명으로」에서 국가소유 및 명령경제에 기초한 사회주의와 무오류의 기계신으로 간주되는 당에 의해 매개되는 대리주의적 실천에 대해 근본적인 이의제기를 던지고 있다. 「공적 공간의 재전유」에서 네그리는 사회적 노동자들의 연재를 본질로 하는 메트로폴리탄 투쟁의 공동생산 분석을 토대로 ‘공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에 부응하는 투쟁 형태와 조직 형태의 규명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루카치에서부터 왕후이, 아리기까지 좌파 지성 16명을 인터뷰해 그들의 육성을 통해 그들의 정치적·철학적·실존적 고민들을 공유하고자 한 『좌파로 산다는 것』은 『탈정치의 정치학』보다는 읽기가 한결 수월하다. 그것은 ‘인터뷰’라는 형식이 주는 편안함도 작용하겠지만, 20세기초의 루카치, 코르쉬,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에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아리기, 하비, 왕후이 등이 눈에 많이 익은 지성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와 공산당의 획일화를 비판하고 고민한 좌파들과 좌파 이론의 토대를 다지고 마르크스주의의 혁신을 고민했던 좌파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치열하고 엄격한 내면뿐만 아니라, 기계화된 사회주의 체제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기까지 하다.

20세기 좌파 지성사의 한 모습
이점에서 『좌파로 산다는 것』은 20세기 좌파 지성사의 한 정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유럽이라는 지역을 벗어나 아시아 등 제3세계 국가에서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예측한 칼 코르쉬, 소련의 과도한 간섭에 반대해 ‘프라하의 봄’으로 대표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사회주의 개혁 운동을 주도한 이르시 펠리칸,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더 풍부하고 깊이 있게 만들기 위해 칸트 등의 철학과 연결시키려 했던 루초 콜레티,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의식으로 지리학의 문제를 파고든 데이비드 하비, 중국에서 좌파가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서구의 좌파 전통과는 또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왕후이 등, 지난 100년 동안 전세계에서 벌어진 좌파의 지적 활동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들 가운데 일부의 이야기는 이 책을 통해 한국에 처음 소개된다는 의미도 지닌다.


이 책을 좀 더 흥미 있게 읽어내려면 16명의 좌파 지성과 인터뷰를 진행한 이들에 주목해보는 것도 좋다. 페리 앤더슨, 타리크 알리, 실라 로보섬 등 좌파 이론의 혁신을 이끌어왔으며 <뉴레프트리뷰>의 편집위원으로 활약했던 지식인들인지라 대담자의 이론적 작업의 성과를 알기 쉽게 짚어내면서도 그들의 이론적 허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좌파 이론가들의 논쟁과 철학적, 실존적 고민의 실체를 여지없이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다.


여러 무늬가 있겠지만, 이 책에 도사린 긴장의 극점은 다음과 같은 대답 속에 있지 않을까. “마르크스주의는 오늘날 위기에 처했으며, 이 점을 인정함으로써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든 시시한 마르크스주의자든 간에 사실상 모든 이들이 의식적으로 이런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루초 콜레티), “‘사회주의’라는 용어의 문제점은 이 말이 서로 다른 여러 방식으로 남용돼왔고 따라서 불신을 받고 있다는 겁니다. 제게 더 나은 용어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용어를 찾아야겠지요.”(조반니 아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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