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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살 청년이 꿈꾼 물길 같은 세상은 어디에?
스물두 살 청년이 꿈꾼 물길 같은 세상은 어디에?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03.04 16: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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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_ 전태일다리(버들다리) 그 너머의 세계

 

▲ 전태일다리에 놓여있는 전태일 흉상. 그의 시선 앞에 ‘봉제훈련생 모집공고’가 확연하게 들어온다. 사진 최익현

‘청계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분신한 청계천(버들다리/전태일다리)과 평화시장은 애초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선정 과정에서 1970년대 이후 추천 장소 가운데 추천 교수들로부터 세 번째로 많은 추천을 받은 곳이었다. ‘청년 전태일’의 분신이 가져온 노동운동의 새로운 변화에 주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 ”

평화시장 재단사의 꿈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청계천 버들다리 건너 평화시장 입구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근로기준법 책을 끼고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40분 분신하기 넉 달 전 일기에 쓴 글이다. 그의 분신은 사회 각계에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일깨워 노동 문제에 대한 각성을 촉구했지만, 최저임금법이 1986년에 와서야 만들어진 것처럼, 노동환경과 근로기준법은 아주 느리게 변화하고 있다.


전태일은 사후 노동운동과 반정부 운동의 상징이 되면서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인물인 것처럼 이미지가 만들어졌지만, 그가 쓴 글을 보면 아주 소박하고 온건한 성품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해지진 못했지만 그가 보낸 탄원서의 내용을 보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악덕 기업주들을 단속해 달라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전태일은 이 탄원서의 마지막을 이렇게 썼다. “각하께서는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 된 도리로서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주십시오.”


스물두 살 푸르디푸른 청년 재단사가 분신으로 생을 마감한 지 44년이 흘렀다. 정부는 2001년 민주화보상법에 따라 전태일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공식 인정했다. 2005년 9월 청계천 6가와 평화시장 입구 사이 ‘버들다리’ 중간쯤에 임옥상이 만든 전태일 흉상이 세워졌고, 2012년 2년을 끌어온 ‘버들다리·전태일 다리’ 명칭 표기 문제도 정리됐다. 다리 근처에 큰 버드나무가 있어서 ‘버들다리’로 불렸던 다리가 사건사적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임옥상이 만든 ‘전태일 동상’의 시선
이 ‘전태일 다리’ 한 가운데에 동쪽을 향해 시선을 둔 전태일 흉상이 서 있다. 설치 당시에는 동상 주변에 오토바이 등을 두지 못하게 해서인지 오토바이가 동상 주변을 침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동상 주변에는 배달을 기다리는 오토바이들이 겹겹이 둘러 서 있다. 그를 기린 동판이 새겨져 있는 바닥과 동판 사이에는 담배꽁초가 깊게 박혀 있기도 했다. 멀리 일본의 노동자들이 응원해서 만든 동판에도 담배꽁초가 박혀 있었다.


머리에 노랗게 물들인 청년 둘이 동상 앞에 세워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 스마트폰을 통해 연신 어디론가 배달 주문을 받는 분주한 모습이다. 그렇다. 전태일 동상의 좌우, 다리 건너 두 시장 길목에는 오토바이, 용달차, 승용차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아침부터 원단을 떼 가려는 이들이 붐볐다. 그들 사이에 ‘전태일’이 서 있었다. 동상 옆에는 누군가 앉아 담배라도 피며 시름을 덜 모양으로 작은 나무 의자를 하나 갖다 둔 것 같다. 그렇다. 이곳을 그저 지나가는 관광객들이건, 이곳에 삶의 일부를 묻고 있는 이들이건 모두 그의 곁을 지나쳐 가야 한다.


흥미로운 건 전태일 동상의 시선이다. 그는 청계천을 남북으로 나눠 남촌과 북촌 어디에도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가닿는 곳은 물이 흘러내려가는 청계 저편이다. 그의 등 뒤편으로는 더욱 솟구치는 빌딩들이 물줄기 저편 좌우를 따라 우뚝 솟아 있는데, 원경이 된 빌딩숲과 동상의 시선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江南도 아닌 江北, 그리고 소규모 영세자본이 입점해 있는 평화시장을 조망해보면, 이 역시 한국자본주의라는 큰 그림의 톱니바퀴 모양을 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강북의 외진 동네에서 평화시장까지 출퇴근했던 전태일의 시선은 고향이 있던 남쪽, ‘미싱’을 돌리던 공장이 즐비했던 시장 골목을 향하지도 않았다.

그저 모두가 행복한 모습으로 어우러지는, 모든 것이 순리대로 풀려서 하나로 모이는 그 어떤 곳을 향했다고 읽는다면 지나칠까? 사람들의 잰 걸음은 44년 전 재단사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불태웠던 바로 그 평화시장 입구를 지나고 있었다. 그가 분신했던 자리에는 그의 뜻을 기려 만든 동판이 설치돼 있었지만, 리어카, 오토바이, 자동차, 그리고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이내 뒤덮이고 말았다. 전태일 동상 뒤편에 서서 그의 시선이 가닿는 곳을 따라 응시했다. 그곳에는 ‘봉제 훈련생’을 모집한다는 세련된 현수막이 단단하게 걸려 있었다. 그 너머 인공으로 조성된 청계천 물길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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