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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과 복원, 미래와 과거
개발과 복원, 미래와 과거
  • 신지은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 교수
  • 승인 2014.03.04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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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39_ 청계천 평화시장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 평화시장, 구로공단

▲ 전태일다리(버들다리)에서 본 평화시장 사진 최익현


서울 동대문 및 청계천 지역에 밀집한 의류 도매시장 평화시장은 유명메이커 의류를 할인해서 파는 ‘땡시장’이 많이 몰려 있어 멋쟁이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평화부틱’이라고 애교 있게 불렸던 적이 있다. 작가 박완서는 1983년 11월 26일 <동아일보>에 실린 「두 개의 평화시장」이라는 칼럼에서 “평화시장에 가면 자신이 부자할머니가가 돼 예쁜 아동복을 한 보따리나 사서 손자들에게 선물할 수 있었다”며, 자신이 서울에 사는 여러 이유 중 하나만을 대야 한다면 평화시장에 물건 사러 다니는 재미를 들 것이라고 썼다. 부자가 아닌 이들이 적은 비용으로 최대한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곳이 바로 평화시장이었던 것이다.

평화시장 주변은 서울시의 대표적인 상업지구일 뿐만 아니라 제조업지구로서, 한국의 산업화 초기부터 의류 제조업체가 밀집해 8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제1의 수출 품목이었던 섬유, 특히 의류제조업의 중심지로 기능해왔다. 서울시에서 보기 드문 의류제조업체 밀집 지역인 이곳은 사업장의 규모 면에서 대단히 영세한 것이 특징이다. 1970년 이곳에서 청계천 피복노동자들의 ‘영원한 횃불’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자살한 이후에도 이곳의 근로 상황은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그래서 박완서는, 가난한 우리가 잠시나마 적은 돈으로 만족스러움을 느끼게 해주는 평화시장 외에 또 하나의 평화시장이 존재함을 말한다. ‘전태일의 평화시장’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는 평화시장과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평화시장의 괴리 속에서 작가는 이 둘이 서로 요령껏 비켜가게 함으로써 타협점을 찾지만, 결국 “큰 돈 안들이고 한보따리의 쇼핑을 즐기고 돌아오면서도 마냥 즐겁기만 한 게 아니라 문득 허전해”지노라며 자신의 사람됨의 한계를 고백했다.


1991년 1월 <경향신문>은 새해의 시작과 함께 ‘소외지대’라는 주제로 기획 연재물을 시작하면서 “우리사회는 소망보다는 실의가, 화합보다는 갈등이 극대화하는 ‘총체적 위기국면’이 계속되고 있다. … ‘고도성장’의 거창한 구호 아래 가려 그늘진 ‘人間以下地帶’에 보다 따뜻한 관심과 대책 수립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썼다. 첫 번째로 다룬 곳이 ‘평화시장 봉제공장’이었는데, 이곳에는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 열악한 작업 환경과 작업장 내의 성적 추행, 근로자 처우 및 복지 문제 등이 심각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도심 환경 개선과 도심 생태의 파괴
지금, 전태일이 분신한지 20년이 지났지만 상황이 여전히 좋지 못하다며 ‘인간이하지대’를 고발한지 또 다시 20년이 지났지만 불행하게도 이 상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재개발이라는 고통이 현재의 고통으로 그 무게를 더하고 있다는 점 정도가 될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 북한 피난민들이 청계천 변 판자촌에서 ‘미싱’ 한 두 대로 옷을 만들어 팔던 데서 출발한 평화시장 상가 공장은 60, 70년대 중반 밀집됐다가 70년대 후반부터 근처로 분산되기 시작했다. 평화시장 의류 사업장은 근처의 창신동, 충신동, 숭인동, 신당동 등지로 분산돼 5인 미만의 영세 사업장과 가내하청업체의 형태로 중저가 내수 의류 제조업체 밀집지역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갔다.

그런 중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들 제조업체들 사이에 대단히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청계천로 위에 설치된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하천을 복원하는 것이 이슈로 등장한 것이다. 재개발 계획이 발표됐을 때 청계천로 일대의 제조업체들은 강력한 반발을 하고 나섰다. 보통 세입자들은 재개발 이후에는 이전보다 비싼 임대료를 지불해야 하므로 반대하는 경향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청계천로 주변 상가들의 반대는 경제적 차원이나 심리적 차원의 이유를 넘어선다.


도심 산업공간의 입지적 성격으로 볼 때 특히 청계천로 주변 공구상가를 비롯한 업체들은 서로 긴밀한 연계망 속에서 일종의 사회적 생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이 네트워크의 일부를 떼어내 철거 혹은 이전시키는 것은 단순히 도시 미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삶과 죽음’의 문제인 것이다. 지저분하고 좁고 어두운 길과 낡은 건물을 치워버리는 재개발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서서히 형성해 온 대단히 복잡한 산업 생태계와 사회적 생태망을 파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전태일이 자신을 버리고 죽이며 지켜낸 청계천은 또 한 번 거대한 폭력과 파괴의 위험에 노출된 것이다.

과거가 미래와 만나야 하는 이유
이명박은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청계천 복원을 대표 정책으로 제시했고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당시 청계천복원추진단장은 ‘복원’이란 원래의 것을 찾는 것과 더 좋은 것을 만드는 두 가지 뜻이 있다는 (기이한) 주장을 펼쳤고, 결국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개발’을 강행했다. 그리고 개발의 결과물은 ‘콘크리트 인공 수로’였다. 그리고 2014년 현재, 동대문시장 근처에는 세계적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세계 최대의 비정형 건축물이 개관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이 건축을 기획한 이는 혹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라는 말에서 ‘역사’라는 개념이 과거의 기억에 관한 것과 더 좋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는 (기이한) 주장을 펼쳤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결과적으로 ‘역사’라는 이름으로 대단히 미래주의적인 개발을 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청계천 복원이나 동대문시장 주변의 개발은 도심지 재생이나 생태, 복지 등의 여러 측면에서 필요한 사업이긴 했지만, 이 과정에서 엄청난 역사와 인간 삶의 파괴가 일어나고 말았다. 청계천은 산업화 시대의 기억과 흔적은 완전히 지워버리고 오직 미래적인 관점의 서사만으로 치장됐고, 대립적인 기억들, 대립적인 서사들의 장인 청계천은 사라졌다. 박완서가 싼값의 즐거움 속에서 문득 허전함을 느꼈던 평화시장, 전태일 열사가 ‘내 이상의 전부’라 했던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네트워크로 짜인 평화시장도 사라졌다. 이제 우리는 두 개의 청계천, 두 개의 평화시장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불편함을 느낄 필요도, 우리의 어둡고 힘든 과거를 기억할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과연 ‘안녕’할까.


‘디자인 서울’을 꿈꾼다면 멋진 디자인의 건축물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미싱과 평화부틱, 전태일과 어린 여공들의 역사에 물길을 대고 거기서 현재와 미래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것이 지금 청계천이 ‘재복원’돼야 할 이유다. 오랜 역사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층들과 온갖 사람들이 얽히고설키며 만들어낸 무질서 속의 질서를 되살리는 복원은 불가능할까.



신지은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 교수
필자는 프랑스 파리5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간사회학 등에 관심이 있으며, 「사회성의 공간적 상상력: 신체-공간론을 통해 본 공간적 실천」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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