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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을 맞은 감회는… 미안합니다”
“정년을 맞은 감회는… 미안합니다”
  • 김봉억 기자
  • 승인 2014.03.03 14: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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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퇴임을 맞은 교수가 후배 교수와 학생들에게

“지금, 방 빼고 있어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2월 27일 오후 2시. 부산하게 짐을 옮기고 있었다. 올해 2월말, 정년퇴임을 맞은 나간채 전남대 교수(65세ㆍ사회학). 퇴임 소감을 듣기 위해 전화를 걸었더니, 정년 퇴임식(28일)을 하루 앞두고 30여년을 오롯이 생활해 온 연구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퇴임이라는 느낌이 별로 없어요. 특별하게….” 휴대폰 저편에서는 사무 집기와 책장 등을 옮기는 소리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 나 교수는 얼마 전에 제자들이 마련한 정년기념식에서 한 ‘고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년을 맞은 감회는 첫 번째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러니까 미안하다, 미안스러운 느낌이 커요.” 목소리가 조금 젖어 있었다. “내가 전남대에 1981년에 왔어요. 그때는 참 교수가 쉽게 됐어요. 나도 박사과정 중에 왔으니까. 신임교수 시절에 학생들을 잘 가르치지 못했어요. 아이들에게 선생으로서 가르치는 것이 허술했던 게 미안해요.”

“참 쉽게 교수가 됐지…학생들에게 미안해”

나간채 전남대 교수
나 교수는 두 번 째 소감도 미안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전남대 해직교수 선배들이다. 1978년 6월,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그리고 1980년 5ㆍ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해직된 교수들. “1981년 전남대에 부임해 왔는데, 해직교수 선배들이 내 이름을 듣고는 당신은 이름이 ‘나간채’니까 진짜 당신도 해직교수가 되겠다고 농담을 했어요. 그런데 저는 해직도 안당하고 지금 이렇게 정년을 맞았어요.”

나 교수는 광주 시내에 있는 사단법인 광주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정년퇴임 이후에는 이곳에서 활동을 이어간다. 나 교수와 전화로 인터뷰를 하는 동안 전남대 연구실의 짐과 책도 이곳으로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 연구실은 1980년대 중반부터 쭉 사용해 왔어요. 전남대에서 제일 전망이 좋은 곳이죠. 연구실에 4층에 있는데, 4층 라인에 있던 교수 중에 총장도 나오고, 국회의원도 나왔지요.(웃음)”

학생들과 후배 교수들에게 전하고 싶은 없느냐고 물었다. “1980년대, 90년대, 2000년대 10년씩 30년을 대학에서 살았어요. 대학 현직 생활을 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 현대 문명이 너무 ‘기능주의’로 흘러간다는 겁니다. 이 기능이라는 것은 역사가 없어요.  역사적 감각을 관심 있게 인식하고 흐름을 만들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학생과 교수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 교수는 대학과 지역사회, 시민사회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대학의 지식인들이 지역사회에 지식을 공급하고 선도하는 역할이 많지만, 광주ㆍ전남 지역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지역마다 대학이 사회에 대해 갖는 역할이나 무게가 좀 차이가 있어요. 광주ㆍ전남지역의 시민사회 활동가들로부터는 대학 지식인에 대한 신뢰가 낮은 것 같습니다. 지난 5ㆍ18때 시민들이 박해를 당할 때 교수들은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죠. 제가 봐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교수들이 한 것이 별로 없어요. 앞으로는 대학이 지역사회와 좀 더 신뢰를 키우고 유대가 깊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나 교수는 고려대에서 박사를 했다. 전남대 5ㆍ18연구소장과 5ㆍ18민중항쟁 32주년 기념행사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5ㆍ18 그리고 역사』(공저) 등이 있다.

나 교수는 퇴임 이후에는 먼저 1894년 동학농민운동부터 광주학생운동, 민청학련 사건, 5ㆍ18민중항쟁 등 현재까지의 지역사회운동을 정리할 계획이다. “광주ㆍ전남을 비롯한 호남지역은 반만년 역사에서 소외와 차별을 받아 왔어요. 주류 사관에서 보면 그렇지요. 동학운동 이후 한반도에서 호남이 갖는 역사의 흐름은 다른 지역과는 달라요. 동학운동부터 현재까지 빛나는 ‘장정 100년’을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전남대 5ㆍ18연구소와 광주연구소,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등 4개 단체는 컨소시엄을 만들어 지난 2012년 말부터 이 작업을 하고 있다. 2015년에 마무리할 예정으로 각 부문 운동을 보고서 형식으로 우선 정리한다. 광주시청과 전남도청의 지원을 받아 관련 연구자 1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연구실 짐 정리가 끝난 모양이었다. “이제 짐 싣고 가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대학은 난리 북새통이라 한참을 싸우고 있는데…”

박광주 부산대 교수
지난 1984년부터 꼬박 30년을 부산대 교수로 지내다 2월말에 정년퇴임 맞은 박광주 부산대 교수(65세ㆍ정치학).

박 교수의 퇴임 소감도 후배 교수들에게 미안하고 착잡하다고 했다. “지금 사실은 교육부 관료들이 대학을 개혁한다면서 대학을 흔들어 놓고 있는데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많은 교수들이 잘못 됐다고 수차례 얘기를 해도 마이동풍 격으로 듣지도 않고 계속 밀어붙여요. 총장직선제 폐지와 성과급적연봉제가 그것이죠. 마음이 무겁네요. 개인적으로는 정년 이후를 제2의 인생이라고 하지만, 국립대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걸 보니까 후배 교수들은 난리 북새통이고 한참을 싸우고 있는데, 일선에서 떠나게 돼 미안하죠.”

후배 교수들에게 부탁도 건넸다. ‘대학의 본질’을 지켜 달라는 것이다. “대학 밖에서 교육행정 관리나 정치가들이 한국대학의 사정을 잘 모르고 개혁을 한다고 하지만 교수들은 줄기차게 알려야 할 책무가 있다고 봐요. 함께 싸우지 못하고 이렇게 물러나지만 결국은 대학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학이 ‘개악’ 되는 건 막아야죠.”

여전히 양적인 연구성과를 강요하는 교육정책은 개선이 시급하다고 했다. “저도 미국에서 공부를 했지만. 미국대학에서 실시하는 연봉제는 한국의 상황과는 달라요. 한국적 발전 방향을 보는 관점에서 깊이 있게 고려해야죠. ‘연구성과’를 강조하는데, 그렇게 양을 따져 종량제를 만들어 놨어요. 심하게 말하자면 ‘쓰레기 종량제’만으로 족하지 않나요. 학문적 정체성과 대학의 위상을 고민할 때입니다. 정체성 확립이 여전히 안 돼 있는 상황인데, 시간을 두고 진지하게 탐구를 해야죠. 논문 몇 편 썼느냐며 성과를 따지고 연봉제와 연결시키니까 교수들도 연구논문만 늘리려고 하죠. 진지한 지적 작업은 실종될 우려가 큽니다. 국가적으로도 손해입니다. 교수들의 ‘밥그릇’ 싸움으로 치부할 문제가 아닌 겁니다.”

박 교수는 연구자는 정년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제 가르치는 부담 없이 연구자의 길은 평생 할 일이라고 말했다. “아직까지 써야 할 ‘글 빚’이 남아 있어요. 사회와 학계에 스스로 남겨야 할 과제가 있어요. 이제는 집이 연구실인데, 집에서 책 읽고 연구해야지요.”

박 교수는 우리나라 현대 정치는 지속적인 민주화 과정이라고 본다. 4ㆍ19 혁명을 기점으로 우리 사회의 헌법을 능멸하는 정치적 상황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벌어졌다는 것이다. 4ㆍ19 이후, 4ㆍ19 정신을 이어받는 사건의 전체를 꿰뚫어 정치적 변동 과정을 정리할 계획이다. 개별 사건을 논의하는 것을 넘어서 큰 맥락 속에서 그 맥을 짚어 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승만 정권 이후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됐는데, 정부와 정권, 국가를 명확히 구분 짓지 못하는 현실도 바로 잡고 싶다. “한 정권이 국가를 참칭해 비민주적으로 해 오고 있는데, 선명하게 구분해 국가의 의미란 무엇인지 제대로 드러내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교수로서 대접을 받고 살아 왔습니다. 이제는 그 빚을 갚고 싶습니다. 긴 호흡을 갖고 깊이 다듬어 보려고 합니다. 3년마다 하나씩 책으로 엮어볼 계획입니다.”

박 교수는 미국 텍사스대(오스틴)에서 박사를 했다. 『한국 권위주의 국가론: 지도자본주의 체제 하의 집정관적 신중상주의 국가』, 『한국정치: 전개와 전망』 등의 저서가 있다.

“자랑스러운 일보다 부끄럽고 후회되는 게 더 많네요”

김명원 숭실대 교수
지난 1994년 9월부터 숭실대 교수(컴퓨터학부)로 재직하다 정년퇴임을 맞은 김명원 교수. 그는 인공지능 분야 전문가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책임연구원을 거쳐 숭실대 정보미디어기술연구소장ㆍ정보과학대학원장을 맡았고 한국뇌학회 회장, 한국신경회로망연구회 회장 등을 지냈다. 서울대를 나와 미국 텍사스대(오스틴)에서 박사를 했다.

“자랑스럽고 보람된 일보다 잘못하고 부끄럽고 후회되는 것이 더 많이 생각이 납니다. 학생들을 보다 따뜻하게 사랑으로 관용으로 대해 주지 못한 것, 동료 교수들과 더 아끼고 사랑하지 못한 것, 강의와 연구에 좀 더 열심히 노력하지 못한 것 등이요.”

김 교수는 정년퇴임을 맞는 소감을 묻자 “학문에서 이렇다 할 만한 것을 이루지 못한 것이 후회되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의 평소 소신은 대학에서의 창의성 교육이었다. 노력은 해 왔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김 교수는 오래 전, 아주 추운 어느 겨울날의 잊지 못할 기억을 들려주었다. 해질 무렵 춘천에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구리 톨게이트를 지나게 됐다. 톨게이트를 막 빠져 나오려는데 톨게이트 끄트머리쯤에서 뜻밖에 김 교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그 추운 날 황량한 허허벌판 톨게이트에서 김 교수를 알아보는, 언젠가 가르쳤을지도 모르는 한 학생이었다. 톨게이트를 지나는 차량으로부터 ‘톨비’ 거스름돈 200원을 이웃돕기 성금으로 모금하기 위해 서 있다는 걸 알기까지 몇 초의 시간이 걸렸다. 전혀 뜻밖의 상황에 당황해 엉겁결에 정신없이 그냥 톨게이트를 빠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김 교수는 집에까지 오는 내내 그 학생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추위에 떨고 서 있는 제자를 위해 교수로서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괴로웠다. 김 교수는 운전하는 내내 되뇌었다. ‘교수란 무엇인가, 나는 교수의 자격이 있는가.’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 때 이후로 매 순간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교수란 무엇인가, 나는 교수의 자격이 있는가 라고요.”

김 교수는 퇴임 이후 숭실대에서 초빙교수로 글로벌 교육사업을 지원하기로 했다. 창의성 개발에 관한 저작과 함께 강연도 할 예정이다. 이제는 여유도 좀 생겼으니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서예와 미술, 클래식 기타 연주도 취미생활로 즐겨 볼 생각이다.

김 교수는 롱펠로우의 시 ‘화살과 노래’로 퇴임 소감을 대신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 동안 내가 만났던 사랑하는 제자들과 동료들의 가슴 속에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노래로 남아 있기를…참나무에 깊은 생채기를 낸 채 박혀 있는 화살이 아닌….”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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