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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세평] 치유 받아야 할 국가
[신문로세평] 치유 받아야 할 국가
  • 홍윤기 동국대
  • 승인 2002.10.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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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05 10:33:00
 ◇ 홍윤기 동국대 철학
반세기 남짓한 기간동안 대한민국은 6개의 공화국을 경험했다. 그런데 한 대통령에 공화국 하나씩 생겨났던 역대 정권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국가 폭력주체의 교대와 정확하게 맞물려 들어간다.

해방정국에서의 반공 테러와 6·25전란에서 체계적 민간인 학살을 감행한 이승만의 제1공화국, 군부세력을 정권 장악과 유지에 동원한 박정희의 제3, 제4 공화국, 광주 시민 학살과 공안정국을 통해 폭력 통치를 일상화한 전두환과 노태우의 제5공화국 및 초기 제6공화국은 각 공화국의 권력 원천이 외양만 달리한 국가 폭력에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이 ‘폭력적 권력’이 각 공화국의 ‘헌법구성 권력’으로 등장한다.

엄청나게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사태는 여기에서 벌어진다. 어떤 형태의 정치도 국민에 대한 통치를 실시하려면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전제할 수 없다. 권력이 폭력에서 시작됐다 하더라도, 그 권력을 갖고 공중을 상대로 정치를 하려면 폭력은 어떤 형태로든 제약돼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국가 정치에서 공화국의 창건 주체들이 사용한 폭력은, 아주 추상적인 어구들이 나열되기 마련인 헌법 전문 부분만 제외하고는, 자신들이 마음대로 만든 헌법 조문에 비춰 보아도 폭력 행사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폭력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폭력체제가 유일하게 그 권력으로 할 수 없었던 일은 바로 그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그것을 금기시해 그에 대해 아예 침묵하는 것이다. 어떤 시대, 어떤 나라의 폭력 정치를 보더라도 통상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금기에 대한 침묵’의 구조화이며, 이 침묵을 깨면 바로 그 뒤에 은폐돼 있던 폭력의 보복을 받는다.

직접 국가 폭력을 담보하는 정보부와 보안사, 군, 검찰, 경찰 안에서 빈발했던, ‘죽어서도 왜 죽었는지 모르는 죽음’, 즉 의문사는 바로 이 ‘구조화된 은폐’와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던 ‘활동성 폭력’의 합작품이었다. 폭력을 은폐할 수 있는 구조가 돼 있으면 폭력은 보다 용이하게 행사될 수 있다. 따라서 국가 기구 안에 구조화된 은폐가 내장돼 있다는 것은 그 국가가 방어치료 능력 없는 에이즈 같은 병에 걸렸다는 중대한 징후이다.

지난 9월 16일로 조사 기한이 끝난 ‘대통령 직속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의 활동을 보면 폭력을 당해 죽은 사람은 있는데 폭력을 가해 죽인 사람은 없는 사건들이 아직도 조사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 의문사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우리는 보통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 개인에 대한 치유로 생각한다. 국가 폭력에 의한 반인륜적 범죄의 진상이 밝혀져야 하고, 그런 범죄에 가담한 권력 측의 책임자 즉 범법자를 찾아내는 것은 국가 안에서 국민 개개인이 평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 현대 법치국가가 이행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의무에 속한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죽는 동안 아무 일도 못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겁한 사람의 이기심을 발동해 한 마디 해보자.

의문사진상규명이나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은 거기에 관련된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개인적 치유나 논공행상식 보상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싸구려 개인 윤리이다.

어느 면에서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왕에 죽은 사람이나 피해자 개인이 아닐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구조적 은폐의 요인을 아직도 벗어버리지 못한 채 계속 국민을 보살피겠다는 이 국가의 성격이다.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이 국가 안에 병적으로 내장된 ‘구조화된 은폐 기제’를 척결하는 데는 현재의 특별법에서 부여한 기한과 권한 이상의 기한과 권한이 필요하다. 즉, 치유 받아야 할 것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이다. 그리고 이 에이즈와 같은 국가 질병에 대한 치유는 아직 그 치료제조차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바로 이 살아남은 사람, 나 자신을 위해 요구한다.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의 활동 기한을 우리 대한민국 국가에 대한 치유가 완료되는 시점까지만 연장하고, 대한민국 국가에 대한 치유가 완결될 정도까지만 그 권한을 강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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