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運化氣, 동서를 아우르는 존재론적 기반
運化氣, 동서를 아우르는 존재론적 기반
  • 이종란 전 성균관대 강사·한국철학
  • 승인 2014.02.2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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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운화측험』 최한기 지음|이종란 옮김|한길사|370쪽| 25,000원

최한기(1803~1877) 철학은 조선 후기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그의 학문적 성격이 서양과학을 수용해 전통철학을 새롭게 발전시켰다는 기존의 주장이나, 서양의 과학기술과 동양의 윤리도덕을 어정쩡하게 결합시켰다는 東道西器論 따위의 평가가 포착할 수 없었던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외래 문물 수용에 대한 주체적 학문 태도는 우리에게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의 학문은 전통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서양과학만이 아니라 서학에 반영된 기독교 철학, 더 거슬러 올라가 중세 후기 토미즘의 영향을 주었던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과 철학에까지 맥락이 닿아 있다. 비록 그러하나 그것을 적절히 비판하고 우리의 문화적 전통에 녹여 시대적 과제에 부응하는 자신의 철학으로 재창조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여기서 그에게 다가온 문제는 동(주자성리학)과 서(서학/기독교)의 지역적 또는 문화적 편협성과 불합리성을 극복하고, 그 둘을 아우르는 보편적 학문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완성한 것이 氣學이다.


『運化測驗』(1860)은 최한기 기학의 존재론적 기반을 뒷받침하는 자연철학적 저술이다.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적 자연학과 형이상학, 그리고 신학적 목적론을 반영시킨 중세 토미즘의 자연신학적 견해를 비판·극복하고 그의 기학적 입장에서 저술됐다.


주지하다시피 4원소의 세계관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등장한 이후까지도 한동안 서양 학술과 문화를 지배했던 우주론으로, 정지된 지구가 우주의 중심으로서 태양을 비롯한 여러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원운동을 하고, 흙·물·공기·불은 달이 운행하는 천구 아래에서 고유한 위치를 점하며 지구와 대기 및 지상의 만물을 구성하는 원소로서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천체는 종동천(Prime Mover)의 영향을 받아 원운동을 하나, 지상 만물의 운동과 생성은 이 4원소의 寒熱乾濕이라는 상호대립적인 성격과 또 이 4원소가 물리적 강제력에 의해 본원적 장소에서 이탈했을 때 그 장소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힘에 의해 일어난다고 본다.

‘지구 자전하며 공전하고 있다’ 확신
그러나 최한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녹아든 기독교 신학의 관점은 물론이요, 이러한 우주자연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우주는 지구가 중심이 아니고 지구는 자전하며 공전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특히 19세기 전반기는 지구 공전설이 소개되기는 했어도 당시는 그것이 정론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앞 시대 홍대용의 경우도 지구자전(지전)설만 주장하고 공전설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최한기는 행성들의 공전에 있어서 그것이 뉴턴의 인력작용에 의해 이뤄진다는 학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인력 현상의 원인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내세운 이론이 행성 간의 상호작용의 원인이 되는 傍氣說(다른 책에서는 氣輪說)과 기가 행성을 실어 운행한다는 설이다. 후자는 마치 물이 배를 띄우는 것처럼 기가 행성을 실어 운반한다는 이론인데, 휘어진 중력장을 따라 행성이 운행한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자기 나름의 기학적 해법인 셈이다.

▲ 1834년 최한기와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지구전도(37.0×37.5cm).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다.


게다가 만물의 구성원소를 굳이 4원소나 5행으로 한정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운화기로 통일시키는데, 만물의 생성과 변화에 4원소의 기계적 적용을 반대하고 운화기의 活動運化의 개념으로 풀어나간다. 다만 여기서 운화기가 갖는 성격으로서 4원소의 한열건습을 받아들이되 그것도 열과 습, 곧 온도와 습도의 요소를 갖고 대기현상을 설명하지만, 이 또한 4원소설의 일부개념을 기학적으로 변용시킨 것이다.

그는 『운화측험』에서 운화기의 구체적 모습과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1권에 24개의 항목을 설정해 풀어내고 있는데, 거기서 운화기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과학의 대상이며 검증 가능한 자연법칙을 갖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더욱이 2권에서는 지구과학(기상학)과 관련해 더욱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이는 최한기의 인식론이 그의 운화기를 증명할 수 없다는 현대 일부 학자들의 견해를 무색케 만든다.


이렇게 운화기의 과학적 탐구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곧 그의 기학에서 ‘무형의 신’으로 표현되는 기독교와 ‘무형의 이’로 상징되는 주자성리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대신 자신의 기학은 ‘유형의 신’과 ‘유형의 이’를 내세우며 그것의 근거가 되는 운화기를 밝히는 것이 바로 이 『운화측험』이다. 후자는 논리적 모순을 감수하고 내세운 용어다. 마치 퇴계 이황이 ‘理發’을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운화기와 그 법칙을 검증할 수 있다는 강조의 표현으로 보인다.

전통-외래 취사선택해 재창조한 사상
사실 최한기의 철학은 다른 철학자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사는 시대의 문제를 비판하거나 해결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주자성리학이 새 시대를 이끌 동력을 상실했고, 서양의 기독교도 미신적인 내용과 우리 전통과의 갈등으로 인해 대안이 되지 못했다. 더구나 동양보다 우월하다고 여겼던 서양과학에도 오류가 있음에야.


이 『운화측험』을 통해서 우리는 최한기의 사상이 전통사상을 이해한 바탕 위에서 외래사상의 철저한 분석과 비교를 통해 취사선택하고 재창조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이 막연히 서양과학을 흡수했거나 영향을 받았다는 단편적인 이해와 추측의 수준을 넘어서서, 영향을 받고 비판한 구체적 사상과 과학이론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철학만이 아니라 과학사를 이해하는 寶庫가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오늘날 학자들이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새로운 관점이 제시된다. 그가 말하는 운화기(신기)가 단지 죽어있는 물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운화기 개념 가운데 ‘살아있는 기운’ 또는 ‘생명의 기운’으로 풀이되는 ‘生氣’는 비록 생물학에서 말하는 생명의 개념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어째든 세계가 생명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물질과 정신, 종교와 과학, 초월과 내재 등의 이분법적 태도에 적용되지 않고 둘을 아우르고 있음을 뜻한다.


다음으로 이러한 운화기 개념으로부터 유기체적 우주관이 등장한다. 이 생명의 기운에 의해 우주만물이 존재의 기초에서 하나가 되는 것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가 돼야 한다는 것에 귀결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점에 천착해 해제에서 다루기도 했다.


끝으로 오늘날 아무리 문화적 국경의 장벽이 없어졌다고는 하나 자기 문화에 기반을 두지 않는 학문은 공허하고 토착화할 수 없기 때문에, 외래문화에 대한 주체적 수용과 포용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이 책은 주목할 만하다. 게다가 자기가 사는 시대의 문제를 비판하고 대안이나 이론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참고해도 좋을 것이다.

 


이종란 전 성균관대 강사·한국철학
필자는 성균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집필과 번역에만 몰두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최한기의 운화와 윤리』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왕양명실기』,『주희의 철학』(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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