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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도로 보낸 지난 5년의 보고서
화학도로 보낸 지난 5년의 보고서
  • 박인혁 경상대 화학과 석박사통합과정
  • 승인 2014.02.2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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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박인혁 경상대 화학과 석박사통합과정

박인혁 경상대 화학과 석박사통합과정
‘일찍 잠에서 깬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서양 속담을 곱씹으며 학부 4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인 2009년 여름날, 초분자화학 연구실 문을 노크하면서 연구의 첫 발을 내디뎠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설렘과 동시에 학부시절 공부의 연장일 것이라는 생각에 다소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이 예상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데는 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강의실이 과학적 사실을 학습하는 곳이라면, 연구실은 이를 생산하는 곳”이라는 지도교수님의 말씀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교과서 없이는 공부를 해 본 적이 없고, 해답 없는 문제를 풀어본 적이 없으며, 토론이라고는 거의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과제를 정하고, 가설과 실험계획을 세우며, 실험기기의 작동법을 배우면서 시도하는 실험에서의 연이은 실패는 허공에 해대는 무수히 많은 헛발질 그 자체였다.

적지 않은 좌절감으로 방황하던 차에 지도교수님께서는 1970년대에 이미 보고된 초분자 물질을 합성해 볼 것을 권하셨다. 그 이유인 즉, 첫째는 이 물질이 갖는 상징적인 중요성이고, 둘째는 훗날 알았지만 이미 제조법이 잘 알려진 물질로, 필자에게 자신감을 주려는 배려였다. 먹잇감을 찾은 독수리처럼 밤을 새워가며 철저히 한 덕분에 3주의 주어진 시간보다 훨씬 빠른 1주 만에 목표한 물질의 합성을 마쳤다. 그리고 이 물질이 오로지 1가 금속과 반응한다는 문헌의 결과에 만족하지 않고, 2가 금속에 대한 반응성을 조사해 결국 3주 만에 2가 금속과의 새로운 생성물 6가지를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1년간 이 물질을 비롯한 몇 가지 초분자를 붙잡고 밤샘을 거듭한 끝에 영국화학회 학술지에 2편의 논문을 제 1 저자로 올리게 됐다. 석사 1년 차에게 돌아온 행운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경상남도가 지원하는 백엽장학생에 선발돼 어려운 경제여건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주었다. 연구에 흥미를 가지고 깊이 있는 연구를 하고자 석사과정에서 석박사통합과정으로 학위과정도 변경했다. 통합 2년 차가 되면서 스스로 새로운 물질을 설계하고 합성할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초분자 물질을 몇 가지 만들었다. 이를 토대로 할로겐화 구리(l)에 의한 거대고리의 네트워킹을 주제로 영국화학회 학술지에 1편의 논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해 말 중요한 이벤트가 하나 찾아왔다. 한국 중화학공업의 초석이 된 포항제철을 설립하고 세계 최고의 제철소로 성장시킨 청암 박태준 회장이 설립한 포스코청암재단의 청암과학펠로우에 선정된 것이다. 재정적인 지원은 차지하더라도 그 명예는 필자에게 오히려 큰 부담으로 다가올 정도로 벅찬 것이었다. 청암 선생으로부터 직접 장학증서를 받는 스냅 사진은 아직도 컴퓨터 바탕화면에 있지만 안타깝게도 청암께서는 두 달 후 영면했다.

2012년 춘계 대한화학회 기간에는 청암펠로우로 선정되신 교수님, 박사후연구원 그리고 대학원생이 모여 학술발표회를 가졌고, 그 중 9명이 초청강연을 했다. 거의 모든 발표자가 이른바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대학 소속으로 자부심이 대단했다. 필자는 전국의 대학원생을 대표한 3명의 연사 중 한 사람으로 학위과정 처음 2년 동안 수행한 연구결과를 보고했다. 아직 전공분야의 학식은 물론 인격적으로도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보인다는 말을 조금은 실감할 수 있었다.

2012년 여름에는 지도교수님을 도와 과학기술한림원에서 주관한 우수고교생 멘토링 사업에 참여해 전남 여수 출신의 한 고교생 지도를 맡아 비교적 단기간에 연구결과를 대한화학회 영문 학술지에 발표했다. 그리고 2~4년차 동안에는 세계수준연구중심대학육성사업(WCU) 석좌교수를 맡으신 J.J. 비탈 교수님의 (싱가포르대) 지도를 받아 공동연구를 수행했다. 그 첫 결실로 미국화학회의 결정학회지에 논문을 게재했다. 그 후 다공성 나노 골격체 내부에서 자전거 페달처럼 유기분자가 가역적으로 회전하는 현상을 발견해 유럽화학회지에 논문을 게재했다.

4년차인 2012~2013년 겨울에는 용매 없이 고체상태 일어나는 분자간 광-유도 첨가반응을 좀 더 심도 있게 수행하기 위해서 싱가포르대에 약 5개월간 파견 교환학생으로 일하게 됐다. 이 기간 동안 가장 큰 수확은 금속초분자의 자기조립 특성을 통해 유기 단분자를 측면으로 정렬한 후 여기에 빛을 쪼이면 고분자를 제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었다.  귀국 후 지난해 상반기 동안 이 과제에 집중한 결과 금속초분자의 광반응에 의해 친환경적인 고분자의 합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성공했다.

쉴 틈 없이 달려온 지난 5년간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리한 작업 때문에 두 팔목에서 전달되는 깊은 통증은 필자에게 밤새 잠들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급기야 손목터널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고 지난 연말 두 팔목 모두 수술을 받은 후 회복 중에 있다. 그러던 2014년 새해 벽두 화학도면 누구나 선망하는 학술지인 안게반테 케미의 내부 표지에 광-유도 고분자 논문이 필자가 디자인한 큰 화보와 함께 게재됐다. 잠시 캠퍼스타운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재충전을 위한 휴식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화학도로 보낸 지난 5년의 연구실 생활은 현재에도 진행형이다.

박인혁 경상대 화학과 석박사통합과정
경상대 화학과에서 금속초분자화학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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