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8 11:25 (목)
교육단상_ 피할 수 없으면 붙어라
교육단상_ 피할 수 없으면 붙어라
  • 양애경 한국영상대·방송영상스피치과
  • 승인 2014.02.24 10: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애경 한국영상대·방송영상스피치과
지난해, 3월이 다 지나가기도 전의 일이다. 강의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눈을 들어 보니 여러 명의 학생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깨워 봐도 그때뿐이고, 반응도 시원찮았다. 다음 시간에는 아예 출석을 부를 때부터 눈을 감고 있기도 했다. 큰일 났다 싶었다. ‘교실 파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리고 스마트폰과의 신경전이 늘 문제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내 강의가 그렇게 지루한가. 아니, 이건 지루 정도가 아니라 무시에 가깝지 않은가. 설상가상, 1학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단골 결석생도 생겼다. J다.

J는 두꺼운 검은 안경을 낀 남학생이다. 작가 지망생인 J의 부모님은 교사이고, 입학식에 참석해 아들의 장래를 상의하실 만큼 자식에 대한 관심도 커 보였다. 여러 모로 기대가 가던 학생이었고, 집과 가까운 다른 대학을 포기하고 온 만큼, 그 이상 더 잘되게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도 가졌다. 그런데 2주가 지나도록 제대로 출석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학생 하나를 앞세우고 J가 산다는 자취집으로 찾아갔다. 속이 쓰려 하더라는 말을 듣고 위장약이라도 사다주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아 임시변통으로 우유를 사들고 갔다. J는 자다 깬 듯 흐릿한 눈으로 나를 맞았다. 왜 학교에 나오지 않느냐 물으니 그저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단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단다. 그리고 잘 맞지 않는 학과목도 많고. 그 후에도 J의 컨디션이 나아지지 않았는지 기말고사 기간에도 간혹 결석이더니, C학점만 되도 받을 수 있던 전액장학금을 놓쳐버렸다. 이렇게 되면 다음 학기에 학교로 돌아올지가 불확실하게 된다.

2학기 시작 무렵이었다. 다행히 J는 부모님께 단단히 야단을 맞은 후 학교로 돌아왔다. 그런데 J와 가까우며 남학생들의 중심인 S가 돌아오지 않았다. 성형수술이 필요할 만큼 크게 얼굴을 다쳤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있을 때 생긴 문제를 교수에게 잘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어렵게 속사정을 듣고 보니 J, S 등이 시내에 놀러갔다가 시비가 붙어 주먹질을 당했는데, 상대방이 그쪽으로 유명한 아이들이라는 것이었다. 아찔했다.

경찰서에 출두하는 날, 나도 함께 갔다. 담당형사에게 평소 거친 학생들이 아니라고 증언하고(그건 사실이다), 멀리서 작가가 되려고, MC가 되려고 공부하러 찾아온 학생들이 이 지역에서 이런 일을 당하니 학생들을 맡은 입장에서 부모님들께 너무 죄송한 일이라고 말씀드렸다. 탄원서도 썼다. 상대방의 전력이 화려했던 만큼 일은 별 문제없이 해결됐다.
 
그 후 강의시간이 변했다. 1학기 때 엎드려 있던 학생들이 질문에 제일 먼저 대답했고, J는 재치 있는 아이디어를 종종 발표했다. 강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면 S가 분위기를 평정했다. 어쩌면 나는 학생들의 테스트를 통과했는지도 모르겠다.

2013년 가을, 상담수기 쓰기 ‘내가 변했어요’ 교내대회가 열린다는 공지가 떴다. 나는 J에게 이 대회야말로 네게 딱 맞는 콘셉트라고 부추겼다. J는 ‘그렇네요!’라고 쿨하게 답변했다. 그리고 J는 이 대회에서 가볍게 최우수상을 타냈다. J는 「열정과 현실 사이에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상담을 나름대로 이렇게 정의 내렸다. “서로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보면서 서로 의견을 나눠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리고 2학기 말에 학생들이 만든 영상작품을 상영하면서, 1학기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대강 짐작하게 됐다. J와 S가 속한 조에서 만든 단편영화의 제목은 「피할 수 없으면 붙어라!」였다. 전설적인 음주가로서 후배들을 술로 괴롭히는 선배와, 그를 꺾기 위해 도전하는 후배를 그린 무협지 버전의 코믹물이었는데,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2014년 새 학기가 시작되려는 지금, J도 S도 학과에서 중요한 인물이 됐고 성적도 많이 올랐다. 하지만 쉽게 해피엔딩을 기대하기엔 나는 너무 오랫동안 교직생활을 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데, 나는 가지가 아주 많은 나무에 사는 새다.
 
양애경 한국영상대·방송영상스피치과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돼 등단했다. 시집에 『맛을 보다』 등이 있으며 애지문학상, 한성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