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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내던진 땅, 그곳에 피어오르는 노래
신이 내던진 땅, 그곳에 피어오르는 노래
  • 최자영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HK교수·서양고대사
  • 승인 2014.02.18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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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이야기 11_ 아토스, ‘아기오 오로스’의 수도원 나라

▲ 현재 터키 영토지만 고대 그리스 정교회의 상징인 성 수멜라 수도원 출처 위키피디아 커먼스


‘정교의 본산’으로 불리는 아토스 자치체제의 삶은 가치관, 주변환경, 일상 등에서 현대의 세속적 삶과 다르다. 아토스에서는 시간이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날마다 신을 향한 찬송이 원초적 자연과 하늘을 배경으로 울려퍼져 경이로움을 더한다.

‘아기오 오로스(聖山)’는 그냥 오로스(山) 혹은 아토스(山)로 불리기도 하는 곳으로,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지역, 테살로니키 부근의 해변 할키디키 반도에 부속된 아토스 반도에 있다. 할키디키 반도는 손 등 모양의 땅 끝에 세 개 작은 반도가 손가락 같은 모양새로 달려있는데, 가장 동쪽에 있는 반도가 아기오 오로스이며 그곳에 아토스 산이 우뚝 솟아있다. 아기오 오로스란 이름은 1144년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가 메기스티 라브라스 수도원에 내린 칙서에 처음 언급된 데서 유래하게 됐고 그 후에는 ‘아토스의 아기오 오로스(Agionymo Oros of Athos)’로 불리기도 했다.


아토스는 그리스 정교 수도원의 세계적 중심지로서,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곳은 그리스에 속해있으나 수도원의 자치 구역으로 그리스의 법이 아니라 전통의 자체 종교적 법에 따라 통치되는 독립된 나라와 같다. ‘성모 마리아의 정원’으로 불리는 이곳에는 소규모 암자나 부속 시설을 제외하면 현재 약 20여개의 大 수도원이 있다. 아토스 산은 해발 2천33m로 위엄과 정기를 품고 있으며, 그 동굴이나 바위 벼랑 위에 세워진 수도원들이 원초적 자연을 배경으로 일천년의 풍상을 견뎌내고 있다.


그리스는 중세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기독 정교회(Orthodox Christianity)뿐 아니라, 그 전부터 연연히 내려오는 방만하고 자유로운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의 전통을 함께 지니고 있다. 동양과 서양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 그리스는 문화적, 종교적으로도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전통을 아우르는 중심에 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전통 아울러
아토스도 기독교가 그리스에 들어오기 전 이미 그리스 신화와 밀접하게 연관된 곳으로, 이곳에서 거인 기간데스(자이언트)들과 올림포스 신들 간의 전쟁 일어났다. 아토스는 하늘(우라노스)과 땅(가이아)의 아들로 기간테스의 두목이었다. 신화에 따르면, 아토스 트라케의 큰 산을 떼어내어 올림포스의 신들을 향해 던졌는데, 그것이 빗나가서 바다에 빠져 생긴 곳이 그의 이름을 딴 아토스 반도가 됐다고 한다.


아토스가 언제부터 그리스 정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러시아에서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가 이곳에 왔고 그 때부터 이곳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마리아가 사도 요한과 함께 키프로스로 항해하다가 심한 폭풍을 만나서 이곳 아토스 해변에 닿게 됐는데, 그곳은 오늘날 ‘이베리아 인들의 聖수도원’이 있는 곳이었다. 사실 10세기 이후 이곳 아토스에는 그리스 인 뿐 아니라 멀리 이베리아(이스파니아)인, 아르메니아 인, 시켈리아 인, 이탈리아 인들이 세운 수도원도 있었으며,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진 곳도 있다.


뜻밖에 아토스에 닿은 마리아가 주변 경관에 감탄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이곳이 당신의 땅이요 정원이요 천국이 되리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후 이곳이 ‘성모 마리아의 정원 (Lot and Garden of Virgin Mary)’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4세기 로마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곳에 수도원을 많이 지었다는 말도 있으나 그런 증거는 남아있지 않다. 아무튼 4세기 이후 이곳에 기독교도 및 은둔의 수도승들이 생겨났고, 9세기경에 이르러 많은 군집이 이루어지면서 수도원이 다수 들어서게 됐다.
아토스 즉 아기오 오로스 수도 생활의 선구자로 7세기 말 페트로스 아토니티스, 8세기 혹은 9세기의 에우티미오스 네오스 등 고명한 수도승들이 있다. 전자는 은둔적 수도생활, 후자는 집단적 수도생활을 지향한 것으로 서로 차이가 있다.


아토스의 수도 생활이 본격화한 계기는 843년 비잔티움 여제 테오도라가 총대주교 메토디오스 1세와 함께 콘스탄티노플 공회의를 소집해 성화상을 다시 인정하면서 성화상 투쟁에 종지부를 찍게 될 즈음이다. 약 100여년 계속된 성화상 투쟁을 피해 수도승들이 이곳으로 피신처를 찾게 됐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성화상 투쟁이란 8세기 초 비잔티움 황제 레온 3세 때 시작돼 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갈등으로 레온 3세가 정교회의 聖畵 및 聖像을 금지하면서 발생했으며, 약 1세기 후 테오도라 여제가 소집한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성화만을 인정하는 선에서 일단락됐다. 성상은 우상이라 할 수도 있으나 성화는 그렇지 않고 기독교의 이해를 돕는 수단으로 정교에서 용인되게 됐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내려와서 정교회에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마리아의 성상이 없다.

마리아의 聖像이 없는 이유
885년 바실레이오스 1세 황제의 칙서에 의해 아토스는 다른 세속과 단절돼 수도승들만 머물게 됐고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내려온다. 이어서 960년 흑해의 트라페주스 출신인 아타나시오스 아토니티스는 산재한 흩어져 은둔해있는 수도승들을 수도원 조직 내로 포섭하고 그 생활지침으로 제1차 강령(Typiko 혹은 Tragos: 염소가죽에 적었다는 뜻)을 만들었다. 후에 이 강령은 비잔티움 황제 이와니스 치미스키스(제위 969~976)의 윤허를 얻게 됐고, 아타나시오스는 당시 아기오 오로스의 58개 수도원의 대표가 됐다.


‘정교의 본산(방주: Ark of Orthodox)’으로 불리는 이곳 아토스 자치체제의 삶은 가치관, 사고방식, 주변 환경, 일상 등에서 현대의 세속적 삶과 다르다. 우선 아토스에서는 시간이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원초적 자연과 하늘을 배경으로 울려퍼져 경이로움을 더하는 곳이다. 일력도 우리가 사용하는 양력인 그레고리력(曆, Gregorian calendar: 1582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율리우스력을 개정한 것으로 100으로 나눠지는 해는 윤년에서 제외하되, 400으로 나눠지는 해는 윤년으로 둠)이 아니라 그 전의 율리우스 구력(舊曆: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동거했던 로마 장군 율리우스 케사르가 기원전 46년 제정한 것으로 4년마다 윤년을 둠)이 사용되고 있다. 지금도 여성들은 이곳에 출입할 수가 없다.



최자영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HK교수·서양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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