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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의 형사재판제도가 식민지적 근대화의 길을 밟게 된 과정은?
근대 한국의 형사재판제도가 식민지적 근대화의 길을 밟게 된 과정은?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4.02.18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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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회 대전대 교수, 근대사법제도 형성과정 밝혀

종래의 재판제도사 연구가 재판에 관련된 법령과 제도에 대한 해설, 그리고 재판의 구체적 사례를 소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면, 이번에 출간된『한국 근대 형사재판제도사』(도면회 지음, 푸른역사 刊)는 개화기 한국의 정치적 투쟁과 사회적 갈등을 중심에 놓고 형사재판제도의 변화를 분석하고 있어 그 의미가 남다르다. 도면회 대전대 교수(역사문화학과)는 이 책에서 1899년 이래 대한제국이 전제군주정을 추구함에 따라 재판기관이 한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지 못하고 오히려 지방관의 민중 수탈 도구가 됐고, 이로 인해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연관성을 짚어낸다. 이 책은 그간 한국사 연구가 식민지화의 원인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외적 요인에서만 찾으려 했을 뿐, 한국 사회 내부에서는 찾으려 하지 않는 편향된 시각을 견지해왔던 학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책의 결론 부분을 발췌해 소개한다.

갑오개혁기에 개혁된 형사재판제도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조선 왕조 내내 사법권은 통치권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사법권을 통치권력으로부터 분리시켜 전임 사법관이 담당하게 하는 근대적 사법제도의 이념은 전제군주정을 지향했던 황제와 전통적 형벌권에 익숙했던 관료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형사재판제도의 개혁이 실패한 근본 원인은 여기에 있다고 보인다.

조선 후기 이래 통치 권력을 일신에 구현하고 있었던 군주권은 갑오개혁기 개화파정권의 입헌군주제 구상에 의해 극히 약화됐다. 아관파천으로 친일 개화파 정권이 몰락하고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군주권은 입헌군주제적 틀 내에 머물고 있었다. 독립협회운동으로 대표되는 개화파세력과 이를 지지하는 민권운동세력들이 진압된 1899년 이후에 가서야 전제적 군주권이 성립했다.

도면회 대전대 교수(역사문화학과)
갑오개혁 기간 동안 형사재판제도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조선 왕조 형사 법규는 동일한 범죄 행위라도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친소관계, 관직의 고저, 신분의 귀천에 따라 형량이 체가 또는 체감되는 가부장제적·신문제적·관료제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형사정책상 이러한 원리는 부정되고 몇몇 예외(칙·주임관의 범죄, 국사범, 황족의 범죄 등)를 제외하고는 국민동등권적 원리가 등장했다. 연좌제가 폐지되고 신분 차별적인 재판 절차가 거의 부정됐다. 사법관이 재판 확정하지 않고는 형벌을 과할 수 없으며 군율관계 범죄 이외에는 모든 범죄를 사법관만이 처벌할 수 있다고 해 사법권이 분리·독립했다.

재판기관의 위계구조는 갑오개혁기에 제도상으로는 변혁됐지만 개화파 정부의 단명과 정부 재정의 부족으로 인해 아관파천 이후 다시 과거와 유사한 구조로 돌아갔다. 즉, 고등재판소에서 칙임관·주임관 등 고급 관료의 범죄, 국사범에 대한 단심 재판 및 일반민이 제기한 상소심을 관장하고 개항장재판소·지방재판소에서는 일반 민인의 재판을 담당하는 관할구조가 형성됐다. 그리고 이들 재판소의 재판업무를 감독하고 총괄하는 기관으로서 법부가 사법권을 일원적으로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 점 역시 구래의 재판제도 구조에서 형조가 전국의 재판을 일원적으로 총괄하고 있었던 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갑오개혁기에 사법권이 독립됐다고 하지만 행정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한국 사법권 침탈은 영사재판권이라는 불평등조약상의 특권에 편승한 것이었지만, 재판제도의 많은 문제점, 특히 군수·관찰의 탐학과 각급 재판 속의 불공정한 판결 등에 편승한 것이기도 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확신한 일본은 1905년에 들어서부터 소위 ‘시정개선’이란 명목하에 한국 정부의 사법권을 침탈하는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국 인민들이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인근 일본 영사관 또는 공사관에 와서 직접 호소하라고 한 것이다.

한국주차 일본군 사령부는 한국 정부와 사전협의도 거치지 않고 군사작전상 필요하다는 명목 하에 1905년 1월 이후 서울과 그 인근 지역에서 집회·결사·언론의 자유를 제한했으며 이를 위반하는 행위는 한국 경찰과 재판기관이 아니라 일본군 헌병대가 처벌하게 했다. 1905년 2월에는 한국 정부와 ‘경무고문용빙계약’을 체결한 후 각도에 일본인 경무보좌관을 파견, 각종 범죄에 관한 건을 관장하게 했다. 이에 따라 한국민이 그동안 억울하게 처분받았던 사건을 호소하는 경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6년 초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재판 제도의 개선을 중대한 급무를 설정하고 한국을 손쉽게 식민지화하려는 구상을 추진한 것은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감부는 일본인 판검사를 한국의 법무보좌관으로 고빙하게 해 각급 재판소의 재판 실상을 보사 보고하게 하고 이에 바탕해 일단 죄인 신문시 고문을 폐지하고 군수 재판의 폐해를 제거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과 그에 이은 일본의 대한정책 급선회로 인해 한국의 재판제도는 급속하게‘개혁’되기 시작했다. 통감부의 재판제도 개혁은 그 이전 1906년경부터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주도한 형법 개정 결과를 수용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형법대전』조항을 합리화하고 관민간의 차별조항을 대폭 삭제하는 선에서 이뤄졌다. 재판제도는 일본 재판제도를 이식해 3심제의 확립, 사법과 행정의 분리 원칙이 관철되는 형태로 개정됐다. 그 결과 1908년 8월 1일부터 시행된‘신재판소’제도는 한국민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만족시킬 수 있는 수준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일본의 대한정책이 1909년 초반 이후‘병합’노선으로 확정됨에 따라‘신재판소’제도는 식민주의를 체현하는 구조로 나아갔다. 1909년 11월 ‘통감부재판소령’, ‘통간부재판소사법사무취급령’, ‘한국인에 계한 사법에 관한 건’, ‘한국에재한범죄즉결령’등일련의재판기관관련법규가 반포되면서 한국 법부의 업무는 통감부 사법청에 이관되고 각급 재판소 사무 역시 통감부재판소에 인계됐다.

이는 일본의 재판제도를 거의 그대로 이식하되 몇 가지 특례를 두는 구조로 이뤄졌다. 최고법원의 명칭을 고등법원으로 정한 점, 재판 담당 판사를 피고인의 국적에 따라 차별적으로 규정한 점, 일본에서는 예심판사만이 가질 수 있는 예심 권한을 통감부 경부·경시 등 사법경찰관도 행사할 수 있게 해 무제한적 인권 유린을 가능하게 한 점, 벌금형·과료형에 처할 죄에 대해 정식 재판을 하지 않고 통감부 경부·경시 등 경찰관이 즉결 선고를 할 수 있게 한 점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례들은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탄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됨으로써 식민지 형사재판제도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했다. 이러한 점에서 통감부 말기 한국 재판제도는 근대적 합리성이 식민지 지배의 차별성과 결합해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한국의 형사재판제도는 식민지적 근대화의 길을 밟게 됐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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