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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습이 ‘온생명’의 가능성”
“나의 모습이 ‘온생명’의 가능성”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4.02.18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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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 물리학자의 눈으로 본 생명을 읽다

30년 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겸임교수로도 활동한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가『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한울 刊, 2014)를 펴냈다. <교수신문>이 우리 고유의 이론 모색을 위해 2002년 기획했던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에서 장 교수의 ‘온생명’사상이 ‘우리이론’으로 소개된지 12년 만이다. 특히 그는 ‘온생명’사상이 여전히 집중적인 학문적 토론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점에서 이번 책은 그간의 논의들을 체계적으로 정리·심화시켜 추후 있을 논의에 대한 기초 소재를 제공한다는 의미망을 획득한다. 책의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다.

필자가 젊은 시절 크게 공감했던 시인 테니슨의 시가 있다. 그는‘갈라진 벽 틈에 피어난 꽃 한 송이’를 뽑아들고 간절한 염원을 하나 내비치고 있다.  “내 만일 네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면, 뿌리까지 모두, 속속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신이 그리고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으련만”이라고 하면서 못내 안타까워한다.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돼 있다. 하나는 표현 그대로 내가 만일 ‘네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신과 인간마저 이해할 것이라는 긍정적·직설적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갈라진 벽 틈에 피어난 꽃 한 송이’조차도,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지 않는 한, 따로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전체론적인, 그러면서도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닌, 숨은 의미이다.

우선 테니슨의 시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론적 절차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꽃 한 송이를 주저 없이 뽑아내어 뿌리까지 몽땅 자신의 손안에 들고 있다. 고찰 대상을 확고하게 선정해 이를 고립시킨 후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려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근대 과학이 성공적으로 채용해온 대표적인 방법론이다. 이미 데카르트가 그의『방법서설』에서 잘 말해주듯이 우선 문제를 잘게 나눠 가장 간단한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인데, 테니슨은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단순한 대상으로 ‘갈라진 벽 틈에 피어난 꽃 송이’를 선택했던 것이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이보다 더 단순한 대상으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것들을 택할 수 있으며, 실제로 많은 생명 연구자들이 이들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이들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고 그 분자생물학적인 내용들을 거의 완벽할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테니슨이 말한 대로 이 꽃 한 송이가 무엇인지를 속속들이 이해하는 단계에 왔다고 할 수 있는가? 테니슨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그는 “어린 꽃이여-내 만일 네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면, 뿌리까지 모두, 속속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다면”이라고 읊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뿌리까지 모두, 속속들이 모두’들여다보기는 했지만 이것만을 통해서는 ‘네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테니슨도 이 점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다음 구절, 즉 ‘나는 신이 그리고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으련만’이라는 말을 가볍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테니슨의 이 시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꽃 한 송이를 ‘뿌리까지 모두, 속속들이 모두’ 들여다볼 수 있더라도 이것이 곧 생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 시인이 노래하듯이 생명이란 이처럼 불충분한 어떤 것 또는 열려 있는 어떤 것이라 규정하고 그 무엇이 와서 이 결여를 채워주길 기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이것이 어떻게 해야 충분한 것이 될 수 있는지, 채워야 할 이 결여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찾아 나설 수도 있다.

이 책에서 우리가 취한 것이 바로 이 적극적 자세이다. 채워야 할 결여의 내용이 바로‘보생명’이며, 이렇게 해 생명으로의 충분한 조건을 갖춘 것이 ‘온생명’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이 온생명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바른 자리를 발견하게 된다. 특히 인간의 이해를 위해서는 우리는 생명이 지닌 매우 독특한 성격인 ‘주체적 양상’을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것이 바로 ‘삶’으로 이어지는 핵심고리가 된다.

여기서 놀라운 가능성으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온 생명의 자의식, 곧 삶의 주체로서의 온생명이며, 이것은 저 밖에 있는 어떤 새로운 존재가 아니라 바로 내가 깨달은 나 자신의 모습이다. 나는 ‘작은 나’로서의 내 개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큰 나’로서의 온생명의 삶을 함께 영위해가는 존재임을 발견한다. 물론 작은 나로서의 내 개체는 조만간 끝이 날 것이지만, 큰 나로서의 온생명은 좀 더 길게 지속될 것이며 어쩌면 영구히 존속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운명이 지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주체가 돼 내 삶을 스스로 영위하고 있는 나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경로가 정해질 살아있는 현실이다. 나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지어 나가고 있다. 작은 나로서도 그러하지만 큰 나로서도 그러하다. 내가 지금 큰 나를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이 큰 나는 영구히 존재할 수도 있고 조만간 사라질 수도 있다.

이러한 자리에 왜 내가 서게 된 것인지, 그리고 이것이 필경 어디로 갈 것인지, 이건 필자도 모른다. 우주가 밝혀지면 질수록 그 바탕에 놓인 신비는 더욱 깊어지고, 내 정체가 자각되면 될수록 내 삶은 더 큰 신비로 이끌려 간다. 나에게 신의 존재는 바로 이 신비와의 교섭 속에 있다. 나는 끝없이 이 신비의 정체를 묻고 더 큰 신비를 찾아 나서지만 설혹 그 답변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신비에 대한 경건한 자세만은 유지해가려 한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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