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09:45 (목)
是非世說_ 한국 천주교의 福者들
是非世說_ 한국 천주교의 福者들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4.02.18 11: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천주교는 1784년을 그 시발점으로 삼는다. 그해 봄 중국 베이징에서 영세한 뒤 귀국한 이승훈이 교회예절과 교리강좌 등을 열고 신앙공동체를 만들면서 한국의 천주교회는 그 역사를 시작한다.

한국의 천주교 전래는 세계의 다른 나라와 그 유형이 좀 다르다. 천주교 발상지인 유럽의 선교사들이 와서 전파한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뿌리를 내린 측면이 크다. 알려진 대로 이 과정에서 무수한 신자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선교가 아니라 ‘피로 물든 순교의 역사’라는 표현이 생겨났다. 한국 천주교는 신해(1791년), 신유(1801), 기해(1839년), 병인(1866년) 등 모두 네 번의 박해 속에 2만명의 순교자를 냈다.

자생적인 신앙의 터에서 이토록 많은 순교자를 낸 것은 세계 천주교 사상 유례가 없다.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당시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이 방한한다. 바오로 2세가 김포공항에 발을 딛자마자 땅에 입을 맞추며 “순교자의 땅, 순교자의 땅”이라고 말한 것도 순교의 나라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었다. 바오로 2세는 당시 방한 때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의 이런 공을 기려 김대건 신부 등 103명을 성인으로 추대했다.

그 때로부터 꼭 30년 되는 올해 우리 천주교에 의미 있는 일이 생겼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 대한 福者반열 추대를 위한 로마 교황청의 諡福결정이 난 것이다. 8월 방한하는 프란치스코교황에 의해 시복되는 순교자들은 대부분 신해박해 때부터 병인박해까지의 천주교 초기신자들이다.

천주교에서 복자(Blessed)는 성인(Saint)의 전 단계로 뛰어난 덕행이나 순교로 신자들의 공경을 받는 이들에게 교회가 공식적으로 부여하는 호칭이다. 복자는 시복된 뒤 5년이 지나면 성인으로 올라가는 시성청원 준비를 할 수 있게 돼 103인의 성인 외 우리나라 천주교에 성인이 늘어날 가능성도 많아졌다.

이번에 복자 반열에 오르는 순교자들의 사연이 새삼 주목을 끈다. 이성례는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로 별도의 시복 청원이 진행 중인 최양업의 어머니다. 그 남편 최경환은 이미 성인 반열에 올랐다. 투옥 후 남편이 순교하자 죽어가는 젖먹이 막내를 살리기 위해 背敎를 위장해 석방됐다. 하지만 장남 최양업이 중국에 유학 중인 신학생인 사실이 드러나 다시 수감된 후 지금의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됐다. 이곳에 현재 순교성지가 조성돼 있다.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은 1791년 어머니가 죽자 외사촌 권상연과 상의해 어머니 제사를 안 지내기로 하고 신주를 불태웠다. 이는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사회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었다. 조정은 지금의 전주 전동성당 자리에서 두 사람의 목을 벴다. 이것이 신해박해의 시작이었고, 윤지충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가 됐다. 윤지충은 다산 정약용 어머니의 친정조카이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의 가문은 이번 시복 결정에 모두 7명이 포함돼 대표적인 순교자 집안으로 떠올랐다. 1984년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된 3명의 성인을 비롯해 향후 시복 청원될 3명 등 다산의 친인척 13명이 성인과 복자 반열에 오른 것이다. 1784년 영세를 받은 다산은 1801년 신유사옥의 불길 속에서도 살아남는다. 끝까지 신앙을 지켜 참수를 당한 가형 약종과는 달리 배교를 증언하면서 목숨을 부지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신앙을 목숨으로 증거한 숱한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한국 천주교는 이번 시복 결정으로 그 위상이 한층 더 높아졌다. 추기경도 한 명 더 생겼다. 질적,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 한국 천주교는 이에 따른 역할과 책임 또한 무겁다.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로서의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