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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참관기] 글라스고 ‘국제 영어학 학술대회’를 다녀와서
[학술대회 참관기] 글라스고 ‘국제 영어학 학술대회’를 다녀와서
  • 박영배 국민대
  • 승인 2002.10.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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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03 01:48:04
박영배
국민대·영어영문학과

지난단 21일부터 26일까지 제12차 국제 영어학 학술대회가 스코틀랜드의 유서깊은 명문인 글라스고대에서 열렸다. 영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30여 개국에서 3백여 명의 영어학자들이 참가한 이번 대회에서는 8개의 주제 특강과 4개의 영어학 관련 프로젝트 및 1백20여 편에 달하는 학술 논문이 발표됐다. 일본에서는 유럽에서 연구중인 학자를 포함해 전례 없이 14명이나 대거 참가했으며 한국에서는 필자만이 참가했다. 국제 영어학 학술대회는 1979년에 영국의 더럼(Durham)에서 처음 개최된 이래 2년 또는 3년마다 대부분 유럽의 대학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학술대회는 몇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영어학연구가 이론중심의 분석위주에서 문헌자료 해석에 한층 더 충실해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영어로 쓰여진 방대한 문헌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영어학 연구방법이 이번 대회를 계기로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됐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
영어 문헌이나 자료에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을 적용해 분석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이미 국제 영어학계에서 제기돼 온 물음이다. 촘스키 이론이 나온 이후 급격히 변모하는 그의 이론을 영어 문헌에 적용해 자료 해석을 시도한 학자들도 오늘날에 와서는 상당수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도 무관치 않다. 이번 대회에서도 이와같은 문제의식이 제기됐다는 점 또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언어학자들이 분석하고 설명하려는 문법 범주와 실제 언어현상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문법의 괴리가 나타나는 부분과 언어변화의 관계를 설정하는 작업을 역설한 것 등은 이번 대회를 통해 큰 주목을 받은 주제발표 중 하나이다.

영어학 방법론, 중대한 변화 보여
둘째, 영어학연구의 영역이 전보다 더 확대되고 새로운 시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음을 시사해주는 몇 가지 중요한 작업이 소개됐다. 1990년대 후반으로 오면서 영어학연구는 영어의 사회언어적, 화용론적 연구까지도 포함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됐다. 한편, 유럽 영어학계에서는 이미 1980년대 초부터 영국과 유럽의 여러 대학에 흩어져 소장돼 있는 고대에서 초기현대시기에 이르는 방대한 영어 문헌을 전산화를 통해 영어학자들이 쉽게 접근해 연구할 수 있도록 작업해 왔다. 이번에 소개된 자료뭉치는 요크-토론토-헬싱키를 잇는 방대한 고대 영어 문헌의 추가자료 집성으로 이전에 나온 것보다 한층 보강된 시험판이다.
셋째, 일본 영어학자들의 점진적인 세대 교체가 이뤄지고 이들의 연구가 한층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음을 새삼 확인한 자리였다는 점이다. 이 대회에 참가한 일본 영어학자들의 수는 해가 갈수록 연령의 폭이 넓어지고 발표 논문 또한 일본 영어학연구의 깊이와 폭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일본의 영어학연구의 역사는 1백년이 넘지만 본격적인 한국의 영어학연구는 10년이 채 안 된다. 일본의 영어학은 1900년대 초기부터 일찌감치 유럽의 영어학 전통을 이어받아 꾸준히 발전해 왔으며 그 결실이 오늘에 이르러 국제 영어학계에서 빛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반면, 우리는 1970년대 이후 급격히 변천하는 미국의 언어이론을 받아들여 30여 년 간 언어학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대학 영문과에서 유능한 영어학자를 키우는 일에 소홀히 했다. 일본 학자가 쓴 수준높은 학술서가 유럽의 저명 출판사에서 출간된 예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 영어학계도 이제부터라도 국제 학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유능한 영어학자의 양성과 이에 걸맞는 학술 논문을 차분하게 준비해야 할 것이다.

실용영어교육 판치는 교육풍토 비애
다음 국제 영어학 학술대회는 2004년 8월에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대학에서 열린다. 이 대회에는 우리 영어학자들이 많이 참가해야 한다. 학자들의 연령층도 다양해져야 하며 논문의 영역 또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음운에서 방언, 서지, 사전학, 고문서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야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셰익스피어나 초서 영어를 전공한 진정한 영어학자가 과연 우리에게 있었는지, 고대나 중세 또는 초기현대 영어연구의 뛰어난 영어학자가 과연 우리에게 있었는지 우리 스스로 자문해 봐야할 때다.
교양인으로서의 품격높은 영어대신 실용영어교육만을 고집하는 한국 대학의 잘못된 학문 풍토는 재검토돼야 한다. 대학은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영어학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대학 본연의 사명을 찾아야할 때다. 우리에게 적어도 高飛遠走할 안목이 있다면 이 땅에 우수한 영어학자의 양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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