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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과학자의 응답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과학자의 응답
  • 박철은 고베대 이학연구과 박사과정
  • 승인 2014.02.03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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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생명이론』 군지 페기오-유키오 지음 | 박철은 옮김 | 그린비 | 439쪽 | 27,000원

이 책 『생명이론』은 크게 2부로 구성돼 있다. 원래 따로 출간됐던 두 단행본을 합친 것으로 1부 「생성하는 생명」에서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존재론을 도구삼아 군지 스스로의 독자적인 존재론=방법론을 펼치고 있다. 2부 「나의 의식이란 무엇인가」에서는 1부의 논의를 바탕으로 감각질(qualia) 문제나 서번트 증후군, 자폐증 환자의 인지구조 등 철학과 인지과학에 걸쳐 있는 문제들에 이론적 해답(가설)을 제시하고, ‘불완전 개념속’과 같은 구체적인 연구 방법론을 ‘束’이라는 수학적 도구를 사용해 설명하고 있다. 보다 정교한 수학적 정의는 부록으로 제시된다. 이글에서는 군지 사상의 가장 핵심적 측면을 설명함으로써 『생명이론』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들뢰즈의 존재론에 대한 대담한 독해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들뢰즈의 존재론에 대한 대담한 독해다. 어찌 보면 오독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논의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군지 본인 고유의 사상을 담아내기 위해 원전을 해체해서 자기 식으로 비틀어 읽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논쟁의 여지가 가장 많아 보이는 것은 철학, 과학, 예술을 3항 관계로 대비시키면서, 각각에 현실성, 가능성, 필연성이라는 성분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들뢰즈 식으로 얘기하자면 철학이 잠재성을, 과학이 현실성을 담당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군지의 이러한 의도적인 비틀기는 들뢰즈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철학과 과학 사이에 선명한 선을 그은 것에 반해서 그러한 구분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이 개념 등의 창조를 통해 내재면을 사유한다면, 과학은 함수적 관계, 수학적으로 첨가(adjunction)라 불리는 관계를 통해 두 논리적 공간을 정적으로 대응시키고 있는, 준거면에 갇혀 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군지가 볼 때 이러한 구분은 좁은 의미의 과학이다. 역동적인 관계를 발견할 수 있는 과학, 그 실마리를 군지는 내부관측자 개념에서 찾는다.


내부관측자란 관측이라는 측정 행위 자체가 행위의 경계 조건을 변질시킨다는 것을 깨닫는 자다. 즉 내부관측자는 자신이 관측하는 대상에서 어긋남, 모순을 발견한다. 이에 반해 외부관측자(혹은 내부관조자)란 이 모순을 깨닫지 못하거나, 모순을 발견했다고 해도 은폐해버리는 자다. 군지는 이 개념에 해당하는 것을 들뢰즈의 ‘부분관측자’라고 본다. 이 내부관측자를 통해서 과학은 비로소 정적인 함수적 관계에서 벗어나 ‘무한속도를 갖는 가능성’, 즉 ‘상정된 경계 외부에 위치하는 가능성=잠재성’을 갖게 된다. 이제 가능성은 잠재성이라 부를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측하는 자가 발견하는 모순이란 어떠한 형태인가? 내부관측의 첫 번째 특징은 그것이 일체의 초월적 시각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전체를 원리적으로 (우리는) 조망할 수 없다. 이로써 내부관측하는 자는 매순간 자신이 알고 있는 전체를 역동적으로 바꿔나가게 된다. 이 책에서 그 구체적 모델은 내포와 외연의 관계, 타입과 토큰의 관계 등으로 제시된다. 내포와 외연은 개념을 다루는, 즉 언어적인 인지 구조이고, 타입과 토큰은 전자가 속성이나 形, 후자가 개별적 사례, 대상에 해당하는, 내포와 외연보다 넓은 규정으로 시각적 상 등 언어 이전의 지각 과정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개념들이다.
이들 개념쌍은 군지 사상 전체에 있어 부분과 전체, ‘사물’(モノ. 외부와 구별가능한 경계를 갖는 대상. 외부로부터 조작가능한 실체. 양적으로 세어지는 것)과 ‘~것’(コト. 비한정적으로 전개되는 사태, 내부에서 경험될 수밖에 없는 사건. 강도에 의해 이해되는 것)등 다양하게 변주된다.

만약 이 두 개념쌍들 사이에서 수학적으로 말해 동형관계가 발견된다면, 즉 집합이라고 생각해서 각 원소들이 빠짐없이 서로 대응될 때 이들은 통약가능하고 한 쪽만으로 다른 쪽을 완전히 재구성해낼 수 있다. 이것은 일원론적 관계다. 이에 비해 양자가 완전히 분리독립적으로 한쪽으로 치환될 수 없다면 이것은 이원론적 관계가 된다. 이에 반해 양 집합 사이에 직접적인 대응관계는 없지만 부분적인 동형구조가 숨어 있을 때 이 개념은 쌍대적인 관계가 된다. 군지는 이들 개념쌍이 서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원론을, 완전히 구분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이원론을 거부하며, 정적인 관계(이것이 위에서 말한 첨가 관계다)에 머무른다는 점에서 쌍대적 관계도 비판한다.


결과적으로 이 개념쌍은 관측자 안에서 서로 구분되면서도 혼동되는 관계가 되고, 매순간 서로 대응되는 관계를 바꿔간다. 이 책의 2부에서 들고 있는 불완전 개념속이란 것도 결국 내포와 외연간의 어긋남을 통해 이 두 집합의 대응관계뿐만 아니라 갖고 있는 원소들도 계속 바뀌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 뿐만 아니라 군지 사상 전반에 걸쳐 다양한 분야, 주제들에서 이 도식은 되풀이돼 적용된다.

‘불완전 개념속’이라는 도식
예를 들어 다른 저작인 『시간의 정체』에서는 현재가 한 순간(즉 수학적으로 생각하면 하나의 원소)임과 동시에 베르그송-들뢰즈적으로 생각해서 과거의 기억까지 응축해서 갖고 있고, 또한 미래에 대한 豫期까지 포함하고 있는 폭(즉 현재였던, 또한 현재가 될 순간들을 모은 집합)을 가진 것이라는 양의성을 통해,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시간이 진행하지 않는다는 맥타가트의 시간의 비실재성 논변에 대답한다. 현재는 원소이자 집합이며, 이 양의성을 통해 매순간 모순을 야기하면서 그 모순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으로 인해 시간이 진행한다는 것이다.

『생명일호』에서는 격자구조로 만들어진 단순한 2차원 프로그램 상의 인공생명이 먹은 먹이(하나의 격자)를 인공생명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격자를 통과해서 밖으로 배출될 때 그 경로를 기억함으로써, 즉 하나의 격자가 단순히 자신(부분)만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전체의 정보를 양의적으로 띄게 될 때, 이 프로그램은 마치 아메바와 같이 살아있는 생물체에 가까운 움직임을 띤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리는 의식을 갖는다』에서는 찌르레기 떼와 같은 동물의 집단행동이 마치 전체로서 하나의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일 때 개체가 갖는 움직임의 자유와 전체로서의 질서를 수동적 능동성과 능동적 수동성을 통해 논한다. 즉 수동성과 능동성이라는 것은 완전히 독립된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서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저작들 전체를 통해 다양한 주제들에 매우 복잡한 수학적 테크닉을 통해 설명되고 있지만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은 바로 이 역동적인 쌍대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일본 학계의 수리철학적 계승·발전
1959년생인 군지 교수는 도호쿠(東北)대 대학원 이학연구과를 나와 고베대에 재직하고 있다. 그의 연구는 들뢰즈 수용에 있어서 그 존재론을 과학철학, 수리철학적으로 계승, 발전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들뢰즈 연구는 미야카와 아쓰시(宮川淳), 하스미 시게히코(蓮實重彦)와 같은 미술평론가, 비평가에 의해 70년대에 이미 시작됐지만 철학자에 의한 본격적인 존재론에 관심을 보인 것이라기보다는 들뢰즈의 미학에 주 초점을 맞춰 소개된 셈이다. 그 뒤 1980년대에는 들뢰즈 밑에서 직접 공부한 사상가들의 활발한 집필 활동이 있었고 1990년대 전반까지는 들뢰즈의 저서들의 번역, 소개가 주된 연구의 흐름이었다. 본격적인 응용이 시작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의 일로, 아카데미 내에서 들뢰즈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에가와 다카오(江川隆男)의 ‘반-현실화’에 중점을 둔 들뢰즈 독해나,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의 철학과 비교한 히가키 다쓰야(槍垣立哉) 등의 작업등이 대표적이다. 2000년대 들어서 들뢰즈는 일본 아카데미즘 안으로 더욱 스며들게 됐고 그런 맥락에서 비교연구나 典據연구도 행해지게 됐다.


이러한 연구들 중에는 들뢰즈 사유에서 눈에 띄지 않았던, 혹은 잘 연구되지 않았던 부분을 부각시키거나, 보다 독창적인 형태로 활용하는 것들도 있다. 로트만, 장 카바에이스 등 들뢰즈와 관계하는 현대 프랑스 수리철학을 통해 들뢰즈 실재론의 계통을 연구해가고 있는 콘도 카즈노리(近藤和敬)나 초기의 흄 연구 등을 통해 단편적으로 분해한 뒤 자기 식대로 종합하고 있는 치바 마사야(千葉雅也)등의 학자들의 연구가 그것이다. 최근 이들은 퀀틴 메이야스(Quentin Meillassoux)나 마누엘 데란다(Manuel Delanda)등 들뢰즈 존재론과 과학철학의 계승자들을 일본 학계에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있고, 이들 사상가들 역시도 군지의 작업과 공명하고 있는 이론적 원천들이 되고 있다. '

박철은 고베대 이학연구과 박사과정
필자는 일본 고베대 이학연구과 지구혹성과학전공 비선형과학 연구실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생명과 장소』(공역,), 『가능세계의 철학』, 『생명이론-들뢰즈와 생명과학』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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