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어머님의 떡국
큰어머님의 떡국
  • 교수신문
  • 승인 2014.01.16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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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릴레이 에세이

어렸을 때 새해마다 큰집에 가서 세배를 드리고 친척들이 모여앉아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 중 유독 큰어머님께서 해주신 떡국은 신기하게도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고 맛있게 먹을 수 있었고, 두둑한 세뱃돈에, 큰아버님께서 해주시는 가문 이야기로 몸과 마음이 든든하고 훈훈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요즘 즐겨보는 TV 프로그램은 ‘한국인의 밥상’인데 우리의 영원한 수사반장 최불암 씨가 전국을 다니며 그 고향 토속음식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최근에는 외모가 못생긴 도치나 장치(벌레문치) 같은 물고기로 만든 음식을 소개했는데, 삼척의 한 아낙네가 일찍 남편을 잃고 어린 자식 셋을 ‘장치찜’ 장사를 하면서 번듯하게 키워냈다는 인생스토리에 마음이 짠했다.


또한 최불암 씨 대학동기 중 멋쟁이 음대 여학생이 하는 평양만두집 편에서는 최불암 씨가 알고 싶어 했지만 감히 물어볼 수 없었던 평양만두집 주인의 인생여정도 궁금했다. 이렇듯 음식에는 맛만큼이나 시공을 초월하는 사연과 오감의 기억(개인사)이 있는 것 같다.


나는 한약을 보면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어렸을 때 부모님 사정 때문에 외조부모 밑에서 한동안 자랐는데 한번은 할머니께서 검은 액체를 드시는 것을 보고 괜히 무엇을 드시냐고 여쭸다가 그냥 잡혀서 쓴 한약을 먹게 된 기억이 난다. 참고로 가끔 뱀도 본 기억이 난다. 집에서 떨어져 있는 내가 안쓰러우셨던지 나는 할머니 사랑을 많이 받았던 같다. 할머니께서는 내가 영천 육군 제3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을 때 돌아가셨다. 면회를 온 동생들에게 할머니 안부를 물었는데 동생들이 아무 말 못하고 눈물만 흘리던 것이 기억난다. 할머니가 보고 싶다. 한약이 먹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중에 하나는 뉴욕 베이글이다. 뉴욕의 베이글집은 보통 새벽 4시 정도 베이글을 굽는데 이때 바로 구입한 따끈따끈한 베이글을 그냥 아니면 버터를 조금 발라 아직 조명이 켜 있는 뉴욕 야경을 보며 먹으면 정말 맛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30대 초반 나의 삶은 무척 척박했다, 오랜 객지 생활,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았던 브루클린 지역에서 3교대로 밤새면서 검찰조서를 작성하면서 치열하게 생존해야 했던 젊은 이방인이었다. 거센 일터에서 잠시 짬을 내서 먹는 베이글에서 나는 분명히 큰어머님의 손맛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튀김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얇은 부산어묵(뎀뿌라)에 튀김옷을 입혀 튀겨낸 후, 멀건 떡볶이 국물에 담가 먹는 것을 좋아한다. 초등학교 때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께서는 내가 학교에서 너무 늦게 오는 것을 인식하시기 시작했다. 결국 어머님은 내가 버스비로 떡볶이를 사먹고 매일 늦게 걸어오는 것을 아셨다. 문제는 내가 이 사실을 부인했고, 아버님이 들어오실 때까지 전혀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학생인권조례’에 많이 어긋나는 체벌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스토리는 해피엔딩이었다. 어머님은 직접 학교 앞에 오셔서 떡볶이 가게를 점검하셨고 버스비 이외에도 용돈을 더 주셔서 내가 튀김을 먹고 버스를 타고 집에 오게 해주셨다. 어머님께 지금도 죄송하다. 사실, 나는 학교 연습문제지 비용도 떡볶이 사먹는 데 썼기 때문이다(정확히 한번). 어쨌든 떡볶이는 내 일생 처음의 일탈이었고, 어머님의 처음이자 마지막 체벌을(아동인권과 헌법상 피의자의 권리가 아직 자리 잡지 않았던 시절) 불러온 모험의 음식이다.


모험 하면 우리 가족이 요르단 등 중동지역을 여행했던 기억이 난다. 현지체험을 한답시고 가족을 이끌고 잠시 배낭여행을 했는데, 겁 없이 아랍말로 몇 자를 적어 민박을 하며 다녔다. 그때 200원 정도의 돈으로 빵을 큰 쇼핑백 한 봉지 샀는데, 이는 이른바 플랫브래드(flat bread)로 겉은 바삭하고, 속은 폭신폭신하다. 하루 종일 빵을 씹으면서 손짓 발짓을 하며 다음 잘 곳을 찾는 여행, 나에게는 야성을 확인하는 때였고, 내 아내에게는 확실히 트라우마였던 것 같다. 아주 어렸던 딸애는 시골 동네에서 따뜻한 염소젖까지 얻어 먹여서 그런지 애한테는 중동 하면 친절한 사람들과 맛있는 염소젖을 생각나게 하는 정감 있는 곳이다.
아직 어린 딸에게 좋아하는 음식을 말해 달라고 하면 대게, 된장찌개, 김치찌개 순서로 얘기한다. 학교가 바다 옆에 있어서 해산물을 접할 기회가 자주 있지만 그래도 스테이크, 테라미소, 돈가스나 피자가 아닌 대게를 가장 좋아하니 우리집 딸애는 분명히 서울에서 자란 아이가 아니란 것이 증명된셈이다.


사실 서울에서 내려오신 우리 학부의 한 교수님 사모님이 넋두리로 사모님 아들과 친척들이 모였는데 사모님 아들만 대게가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해서 부모 입장에서 미안했다는 얘기를 흘려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우리 딸도 그렇게 될 줄이야……. 부모 입장에서 지방에 있다는 것이 좀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안식년 때 서울에서 보낸 2학년 주일학교에서 창조주가 만든 세상을 그릴 때 다른 아이들은 태권도 도장, 학원 등을 그릴 때, 우리 딸은 대게, 돌고래(포항에는 고래 고기도 먹는다)와 나무와 과일 등을 그렸는데 이때 부모로서 자부심을 갖게 됐다. 좀 과장하면 딸애를 좀 더 자연친화적이고 지구의 환경을 잘 지켜내는 유엔새천년개발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의 취지에 맞게 키운 것이라 내 자신을 위로하기로 결정했다.
최근에는 한 종편 방송의 「먹거리 X파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착한라면’을 주제로 방송했다. 정말 좋은 재료로 몸에 나쁜 것 안 넣고 맛있는 라면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사실 우리 가족은 한동안 라면을 안 먹었지만 지금은 자주 먹고 있다. 왜 라면이 꼭 착해야 하는지 생각도 든다. 라면은 맛있으면 된다. 해외출장 때 마지막으로 사발면을 챙기면 왠지 출장 준비가 완벽하게 된 것 같고, 그 사발면을 끝까지 안 먹고 돌아오면 나의 절제력에 감동하고 출장환경이 완만했구나 하며 안도감을 갖게 된다. 라면은 전문용어로 나의 ‘comfort food’가 된 것 같다.


영어로 ‘comfort food’란 우리가 가장 익숙한 음식으로 이것을 먹을 때 우리에게 몸과 마음에 심리적인 안정을 준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에겐 단연 떡국이 ‘comfort food’다. 정말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큰어머님의 떡국이 그립다. 원균 제독이 그래도 충신이란 것을 알려주신 큰아버님도 보고 싶다. 요즘은 따뜻한 뉴욕 베이글이 자꾸 생각난다. 아마도 치열한 삶이 다가오고 있지 않나 싶다.

□ 추천 릴레이 에세이 다음호 필자는 김윤규 한동대 교수입니다.



원재천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 국제법/미국형사소송법
필자는 미국 브루클린 사법대학원에서 법학박사를 취득했다. 대한국제법학회 이사, 한국형사소송법학회 상임이사를 맡고 있으며, 북한인권시민연합 국제이사로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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