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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통한 대화의 가능성과 조건을 묻는다
서평을 통한 대화의 가능성과 조건을 묻는다
  • 조경란 연세대 HK연구교수
  • 승인 2014.01.15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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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_ <교수신문> 713호 송인재 교수의 리뷰를 읽고

조경란 연세대 국학연구원 HK 사업단 연구교수(중국철학)가 지난해 말 상재한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글항아리 刊)는 중국 연구에서 있어서 ‘崇中’과 ‘嫌中’을 넘어 ‘硏中’과 ‘批中’을 제시한 도전적 저작이었다. <교수신문> 713호 리뷰에서 송인재 한림대 연구교수(중국철학)는 “신좌파로 구분된 왕후이, 간양이 제국으로 부활하려는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중국 당국과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지적은 전적으로 타당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저자가 長文의 반론을 보내와 2회(716~717호)에 걸쳐 게재한다.

 

서평이란 모름지기 저자가 무엇을 핵심적으로 말하려 하는가에 대한 기본 관심과 존중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 서평에 대한 기본이다. 서평도 일종의 대화라고 할 때, 대화는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하고 나서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때만이 대화를 통해 서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상호인정이 필수조건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즉 해당 분야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정보,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판단할 수 있는 나름의 식견과 입장이 있어야 한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균형 있는 서평이 나올 수 없다. 서평을 쓴다는 것은 자기가 아는 것의 우연성에 기초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주관적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를 쓰면서 한국에서 중국학을 하는 학자들로부터 예상했던 반응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학계로부터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매체와 잡지 여러 곳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응해주고 있다. 둘째, 나의 책 전체가 아닌 어느 한 유파, 특히 신좌파만을 끄집어내 거기에 대해 기계적 또는 즉자적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조금 심하게 말하면 조건반사적 반응에 해당한다. 셋째, 이 책 전체 구도와 취지에 대한 진정성 있는 이해 위에서 정당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론이라면 서평을 계기로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벗어나 인간과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이런 반론이라면 나는 기꺼이 반길 것이며 더 나아가 언제라도 나의 입장을 바꿀 용의가 있다. 하지만 송인재 교수의 서평(이하 ‘서평’)은 바로 이 두 번째에 해당된다.

조건반사적 서평의 한계

조금 장구하게 보일지라도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와 전체구도를 서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겠다. 서평이 책 전체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오히려 그것을 왜소화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목적은 예상보다 빠른 중국의 경제적 굴기와 국제적 위상변화,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따른 중국 지식계의 자기조정의 과정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면서 중국사회에서 비판적 지식인의 조건을 새로이 묻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물음의 배면에는 현대 중국의 지식인들의 사유 속에서 서양의 근대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 창출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가라는 결코 간단치 않은 질문이 깔려 있다. 이 책에서 내가 일본의 근대초극과 관련하여 마루야마 마사오의 비판을 지속적으로 호출하여 비교하려는 것도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의 발로이다.

이러한 전체 문제의식 하에 내 책은 서론에서 7장까지, 그리고 보론조차도 전체의 구도를 가지고 쓴 것이지 이른바 논문모음집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서론과 1~3장에서 말하는 중국 지식계 전체에 대한 움직임과 스펙트럼의 밑그림이 읽는 이의 인식 내부로 들어와야 비로소 4~6장의 신유가, 자유주의, 그리고 신좌파의 내부로 진입하는 데 용이하다. 이처럼 내 책은 중국의 지식인의 어느 한 유파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온전한 서평이 되려면 어느 한 유파에만 초점을 맞춰 서술할 것이 아니라 중국 지식계 전체의 구도 속에서 대륙신유가, 신좌파, 자유주의파 모두에게 고른 시선을 줄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이 책은 이 세 유파를 단순 나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중국사회, 국가 인식의 변화에 대응한 역할 변화를 주문하는 등 이들 유파를 상호관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파악해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유가에 대해서는 모더니티의 문제를 고려하면서 유학담론을 진행할 것을,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재인식과 역설적 접근을 통해 어떻게 ‘중국화’할 것인가를, 신좌파에 대해서는 1990년대의 자기역할을 2000년대 들어와 어떻게 재환기할 것인가를 각장의 결론에서 주문하고 있다. 세 유파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졌을 때 나의 최종 결론인 7장에서 내가 왜 ‘중화성의 재구축’, ‘제도와 가치의 재건’, 그리고 ‘국가와의 거리두기’와 같은 소주제를 설정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한 태도는 앞에서 내가 말한 서양근대의 극복과 새로운 대안문명의 창출이라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동돼 있다.

베이징 올림픽 이후 중국 지식계의 새로운 변화

중국에서 신유가, 자유주의, 신좌파라는 세 유파의 鼎立은 1990년대에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1919년 5·4 이후 1949년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하기 이전까지 30년 동안의 중국사상계는 수 천 년 동안 주류사상이었던 유학이 차지했던 자리를 놓고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경합과 각축이 존재했다. 1949년 이후에는 이 세 유파 중 좌파를 제외하고는 침잠 또는 절멸했다가 개혁개방 이후 중국사회의 성격이 1949년 이전 형태로 회복되면서 그 연속성 하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사상구도인 것이다. 1980~90년대 초반까지 자유주의가 반짝 주목을 받다가 경제성장과 함께 이제 다시 신유학이 ‘주목받는 학문’(顯學)이 됐다. 이 책에서 간과돼서는 안 되는 것은 2000년대 들어와 유학이 사상계의 공통 배경이 되면서 나타난 지식지형의 새로운 모습에 관한 것이다. 유학이 공통인식이 되면서 중국의 지식계는 대전환을 맞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내 책의 4장인 대륙신유가편에서 서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내 책의 62페이지에 제시하고 있는 그림 ‘2010년대 지식지형도’에서 훨씬 입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조경란 교수가 작성한 현대 중국 지식인 유형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직접 그려 넣은 부분인 중국정부의 조화사회론과 베이징올림픽 개최 이후 나타나는 지식계의 새로운 변화다. 그림의 아래쪽에 위치한 신좌파와 대륙신유가는 이 두 ‘사건’ 이후 유가에 근간을 둔 소프트파워의 구상이라는 과제를 두고 만나고 있다. 원래는 가장 왼쪽과 오른쪽에 위치하면서 서로를 경계했던 이들이 문명중국의 재구축이라는 공통과제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위로는 자유주의 유파도 이 두 사건을 계기로 분화했으며―물론 류샤오보 노벨 평화상 수상도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이 중 적지 않은 자유주의자들이 헌정 유학 등에 흥미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일부 자유주의 좌파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공산당내의 민주파와 함께 제3의 길인 사민주의에 대한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것이 중국지식계의 가장 최근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두 움직임이 파워에서는 엄청난 비대칭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지식계에서 이런 비대칭성은 당분간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암묵적 ‘지지’가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중국의 지식지형을 보는 데에 국가라는 존재는 간과할 수 없다. 내가 ‘좌와 우의 교차, 국가 그리고 지식공동체’라는 제하에 별도의 장을 마련한 것은 자본에 대한 입장만으로는 중국에서 진보와 보수, 좌와 우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국가와 자본은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 오히려 많은 경우에 국가 비판이 훨씬 더 근원적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언술을 통해 이 장을 서술한 것은 중국이 사회주의 혁명 이래 반우파 투쟁을 기점으로 하여 국가에 비판적 지식인을 우파로 불렀고 이것이 지금까지도 좌우를 가르는 기준 아닌 기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뒤바뀐 교차현상은 다른 나라 지식인을 엄청 헷갈리게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중국 지식인도 헷갈리게 했는지, 급기야는 내 책 50~52페이지에 소개하고 있는 ‘중국의 좌우파 상세 도해’라는 그림까지 나와 유행하기에 이르렀고 이 그림은 중국의 의식 있는 지식인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국 지식계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쉬이 넘겨서는 안 된다.

 

716호 서평반론_ <교수신문> 713호 송인재 교수의 리뷰를 읽고

이제 송인재 교수가 문제 삼고 있는 신좌파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일단 서평이 책 전체는 차치하고라도 신좌파 전체를 제대로 읽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신좌파에 대한 나의 비판의도와 각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즉자적 대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신좌파는 이미 국가 이데올로그가 됐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왕후이를 포함한 신좌파를 비판하는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즉 내가 이해하기 힘든 것은 정협위원이 된 것을 포함해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을 것은 다 받으면서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명분까지도 내놓지 않으려는 그의 욕망이다. 신좌파 중 왕후이 같은 인물은 내가 보기에 이미 국가가 보호하는 지식인 반열에 들어간다. 그것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확인가능한데, 그 중 하나만 밝히자면 현재 중국에서 실명을 거론하면서 왕후이를 직접 비판하는 이는 극히 유명한 지식인 몇몇 외에는 거의 없다.

국가로부터 혜택받는 지식인의 은밀한 욕망

나는 최근 그의 주장의 양대 핵심을 야오양의 중성국가론을 수용한 당국가화론과 조공체제의 업그레이판인 과체계사회(trans-systemic society)론으로 본다. 당국가화론은 중국이라는 국가는 어느 특정 계급을 대표 한다기보다는, 중국의 모든 계급의 이익을 대변해왔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공산당내의 노선 논쟁과 자신들의 이론 논쟁은 밑으로부터의 의견을 수렴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다. 왕후이는 당내의 이런 실천적 행동이 정당과 국가의 자기조정의 기제였다고 보고 이러한 점들 때문에 개혁개방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트랜스시스템사회는 왕후이가 이전부터 아시아에서 민족과 국가 체제를 넘어서는 단위로서 상정해온 조공체제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결과(졸고, 「중국 지식인의 현대성 담론과 아시아 구상」, <역시비평> 2005년 가을호) 업그레이드한 용어라고 본다.

왕후이에 의하며 조공체제는 유학을 근간으로 하지만 유교문명권을 초월해 있고 한자 문화 혹은 동일한 종교적 신앙을 반드시 조건으로 하지 않는다. 사실상 중앙아시아와 히말라야 지역에도 존재했다. 왕후이가 상정하는 트랜스시스템사회 안에서는 문화의 동질성을 유일한 존재근거로 삼지 않으며 그들 사이의 상호교차와 침투도 자연스런 것이다. 그리고 그 좋은 사례가 청나라의 방목적 통치 형태다(『아시아는 세계다』에 대한 필자의 서평 「‘거대한 편견’의 탈각과 중국 재구축의 욕망」, 25집, 2012 여름호). 트랜스시스템사회라는 개념은 소수민족과 비유교문화원의 조공국가를 의식한 개념어라고 볼 수 있다. 왕후이는 중국만이 가질 수 있는 이러한 특징 때문에 중국이 근대성을 뛰어넘는 새로운 질서를 제시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문명중국의 재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는 중국정부로서는 이러한 ‘수준 높은’ 개념 제시야말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와 가장 지근거리에 있다고 판단할 개연성이 높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왕후이를 포함해 신좌파가 중국모델론 안에 중국사회주의를 주요하게 위치시킴으로써 나는 오히려 중국 사회주의를 왜소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는 마치 동중서가 유학을 국교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유학을 왜소화시켰던 행태와 거의 유사하다. 중국모델론은 오히려 중국사회주의에 대한 풍부한 재해석의 여지를 막아버리는 구실을 한다고 본다. 인문학적 견지에서 평가했을 때 사회주의에 대한 성찰의 가능성을 봉쇄한 것이다. 그리고 신좌파에 대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것은 2012년을 떠들썩하게 했던 충칭모델과 신좌파를 분리해 사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신좌파의 주장의 현실태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역으로 신좌파가 마오 시대를 얼마나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식의 민주를 구상하고 있는지에 대해 적나라하게 확인하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른 것은 모르지만 혹시 文革 때처럼 의도와 목적이 정당하면 과정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어떤 ‘관행’이 충칭모델 건설 과정에서도 반복되어 벌어진 건 아닌지 확인이 필요하다.

나는 왕후이에 대해 적어도 그가 가장 빛나던 시절인 1990년대를 기억한다. 그때를 회상하면 그가 구상하는 중국모델론 안에는 루쉰의 사상의 흔적이 보여야 한다. 절망에 대한 반항을 그렇게 외쳤고 반근대성적 근대성으로 중국의 근대 100년을 표상하려 했던 그의 사상의 21세기적 전환은 적어도 그랬어야 했다. 중국의 20세기 표상으로서 루쉰이야말로 서양근대성을 넘어설 수 있는 자원의 보고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책에서 근대성을 계속 문제 삼으면서 서술하고 있는 것은 근대 중국 100~150년간의 풍부하고 다양한 지식인들의 고민이 21세기 굴기의 완성 국면에 이르자 완전히 거세됐다는 느낌 때문이다.

송인재 교수가 서평에서 왕후이에 대한 평가가 쉬지린과 첸리췬에 근거해 있다고 한 부분에 대해 나는 여기서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 왕후이에 대한 쉬지린과 첸리췬의 비판을 소개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첸리췬과 쉬지린이 왕후이의 정당국가화론을 문제 삼으면서 그 정정기제에 대한, 또 당국체제의 총결산 속에서 중국경제의 굴기를 설명하는 그의 관점을 비판하는 것은 인문학적 지식인으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들에 기대서 왕후이를 보는 것은 하등의 문제가 없다. 어떤 지식인이 자신의 나라에서 어떻게 평가되는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 평가와 무관하게 다른 나라에서 평가된다면 그것은 넌센스다. 따라서 왕후이에 대한 첸리췬과 쉬지린의 평가 외에도 나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더 소개했어야 했다. 정당한 평가를 한국에 제대로 소개하는 것은 중국학을 하는 나로서는 일종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둘째, 송인재 교수의 서평을 보면 내가 마치 앞의 두 사람에만 근거해 왕후이를 평가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나는 다시한번 서평자가 나의 책에서 신좌파를 다루고 있는 6장이라도 제대로 읽었는지 묻고 싶다. 6장은 신좌파가 아직도 비판적 지식인일 수 있는가를 질문하면서 서론을 시작하고 있고 1990년대 신좌파의 역할을 충분히 설명한 바탕위에서 최근 몇 년 사이의 논문의 기조변화를 확인한다. 즉 G2의 등극에 맞춰 왕후이의 국가주의적 측면이 강화돼가고 있는 측면을 서술하고 있다. 서술이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좌파의 정치구상, 충칭모델에 대한 왕후이의 입장에 대한 나의 비판적 견해를 종합적으로 제시하면서 결론에서 신좌파에 대한 나의 입장을 최종적으로 피력했다.

다음으로 서평자가 문제삼고 있는 또 다른 신좌파 간양에 대해서다. 송 교수는 간양의 ‘유가사회주의 공화국’이 정치적 수사일 뿐이라고 했는데 나는 전혀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그런 이해는 간양의 진면목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신좌파가 유학을 갑론을박하지 않는다고 해서 유학을 논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 주장의 심층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나는 이들이 주장한 유가사회주의공화국, 당국가화론, 응답형민주야말로 가장 강하게 정치이념의 유교적 존재형태를 베이스에 깔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이들의 이론에서 공히 유가적 민본주의적 요소를 찾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유가의 엘리트주의와 레닌의 전위론은 어떤 면에서 구조적 상동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가에 대해 갑론을박하고 있는 대륙신유가는 신좌파에 비하면 오히려 훨씬 순진하고 순수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근대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시각 차이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나는 신좌파 특히 그 중에서도 왕후이를―그 자신이 그렇게 불리기를 희망했던―국제주의자, 또는 ‘비판적 지식인’의 범주와는 이제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그 또는 그들이 글로벌리즘에 대한 대항으로 이제 왕샤오동류의 대중내셔널리즘과는 다른 네오-내셔널리즘을 구축하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본다. 물론 여기에는 그러한 변화의 중국적 맥락을 도덕적 차원만이 아닌 이론적 차원에서 설명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기는 하다. 자본에 대한 비판은 중국공산당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이 함께 있을 때 그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마치 티베트 승려가 티베트의 승려사회 내부의 봉건성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중국공산당의 탄압을 문제 삼을 때 훨씬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현대 중국사회의 독법, 사회주의 해석, 유학에 대한 입장, 근대성에 대한 태도 등에서 그 또는 그들은 더 이상 비판적 지식인의 면모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이 세 가지에 대한 이해방식의 근원에는 근대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마지막 심급에서 인문학적 지식인이라면 좌우를 떠나 자신이 처한 위치를 포함해 자기의 생각을 얼마나 상대화할 수 있고 반성적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도외시 돼서는 안 된다. 적어도 나의 책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제대로 된 서평이라면 이에 대한 나름의 자기 입장을 가지고 대응해야 하지 않을까.

 

조경란 연세대 국학연구원 HK 사업단 연구교수·중국철학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지식 지형 문제와 중국의 자유주의 좌파에 관심을 갖고 있다. 『현대 중국사상과 동아시아』 등 다수의 저서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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