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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감 아줌마와 과메기 아가씨
밀감 아줌마와 과메기 아가씨
  • 교수신문
  • 승인 2014.01.02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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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서울행 KTX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준 두 분에게 먼저 새해인사를 전해야겠다. 동대구역에서 서울까지 두 시간 가량 즐겁게 밀감을 나눠 먹으며 이모와 조카처럼 이들과 함께 동행 했던 기억은 다사다난 했던 올해에 가장 인상 깊은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동반석을 회피한다. 따로 네 사람씩 움직이지 않는다면 굳이 마주앉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자리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나는 탁자가 놓여있어서 책이나 신문을 보기에 편한 그 자리를 선호하는 편이다. 운 좋으면 맞은 편 자리가 비어서 다리까지 뻗는 행운도 종종 있다. 낯선 사람의 시선을 부담스러워들 하기때문에 한 좌석이 예약되면 그 맞은 편 자리는 잘 팔리지 않는다. 덕분에 다리를 뻗을 수 있는 운 좋은 날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KTX 승객이 늘면서, 맞은 편 좌석도 거의 다 팔리기 일쑤고, 예매원은 언제나 ‘불편하지 않으세요?’하고 확인한 후 표를 끊어준다.


물론 불편하다. 초기 도시화 물결이 밀어닥치기 시작하던 100여년 전 독일의 사회학자 짐멜이 『대도시와 정신적 삶(Die Grossstaedte und Das Geistesleben)』(1903)이라는 책에서 예견했듯이 ‘익명의 사람들이 부득이 시선을 마주하고 있어야하는’ 부득이한 상황이 도시에서는 늘어간다. 지방에서 학회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동대구역에서 밀감을 한 보따리 싸든 아줌마와 과메기 봉투를 든 아가씨가 맞은 편 자리에 나란히 앉는 순간 나는 아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얼마 후에 잠시 눈을 뜬 사이에 보니 밀감이 한상 차려져 있는 것이다. 다시 눈을 감으려는 내게 밀감아줌마는 한사코 밀감을 권했고, 하나 먹고 말려고 하니 하나 더, 또 하나 더 그리고는 아예 밀감 아줌마와 과메기 아가씨가 하나씩 까서 주는 것이다. 대구와 포항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권하는 이 분들의 친절에 특별한 의도는 없어 보였다. 이유가 있다면, 마주 앉아서도 시선을 회피하고 있던 내 태도가 그들에게는 오히려 불편했던 것 같다.


동행에 대한 시골사람들의 유대 감각에는 좀 특별한 데가 있지만, 이들의 스스럼없는 태도에서 서울생활 30년에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사회관계는 대부분 계약으로 이뤄진다. 그러니 사람들은 계약 이전에 신뢰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뢰를 보내고 받는 일상의 실천에 대해서도 익숙하지 않다. 짐멜의 제자 크라카우어는 『직장인 (Die Angestellten)』(1930)에서 이런 합리화의 진행은 고립된 ‘개체화의 저주’를 동반한다고 진단하고 있다. 법과 계약에 의존하는 사회는 신뢰와 유대에 기반을 둔 사회와는 달리 서로가 서로에게 벽을 치고 ‘창문 없는 단자들(fensterlose monade)’(아도르노)이 돼 가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남의 이야기이기만 할까. 스펙쌓기에 매달리는 청년세대를 보면 우리 사회의 신뢰의 공백을 많은 자격증들과 증명서들로 때워야하는 그들의 역설적 고통이 느껴진다. 또 2013년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철도파업을 위시해서 올 한해를 얼룩지게 했던 사회정치적 갈등들은 편차는 있지만 쌍방간에 신뢰의 기반이 없는 것이 기본적인 문제였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믿음을 주지 못하는 측이나, 믿지 못하는 측이나 서로 신뢰하지 않으니 주먹이 앞서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방법 말고는 해법이 없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지켜보면 우리 사회의 신뢰의 기반이 와해됐고, 지금 우리는 그 혹독한 代價를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불신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사회는 서로 맞물리지 못하는 거대한 기계처럼 겉돌면서 과열되고 있는 형국이다.


요즘은 직장에서도 ‘메리크리스마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 나누는 일이 줄었다고 한다. 신뢰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럴 기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상실된 사회적 유대를 회복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도시사람들과는 달리 시선을 마주하는 것보다 회피하는 것이 더 불편해 보였던 밀감 아줌마와 과메기 아가씨의 감각에서 배울 것이 많다. 익명의 타인들에 대한 이들의 정감이 신뢰지수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치는 선진 대한민국의 불편한 현실을 조금씩 바꾸어갈 수 있는 사회적 비전이 돼주기를, 새해에는 희망해본다.

이창남 서평위원/한양대·비교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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