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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과 해양·비농업의 삶이 제기하는 역사서술의 반란
변방과 해양·비농업의 삶이 제기하는 역사서술의 반란
  • 이영권 제주 영주고등학교 역사교사
  • 승인 2014.01.02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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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조선시대 해양 유민의 사회사』 이영권 지음 ┃한울┃291쪽┃30,000원

자칫 국가주의 역사서술은 역사인식을 도식적으로 만든다. 모든 것을 중앙정부의 관점에 맞춰 재단하고 규정짓는다. 기존의 중세사 서술이 중앙 중심, 농업경제 중심, 육지 중심으로 이뤄진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섬 지방의 중세사는 상업교역경제, 바다를 중심 무대로 기술해야 할 부분이 많다. 이는 바닷가 변방에 대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생각의 반란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실제 15~17세기 제주섬을 떠나 남해안 등지를 유랑하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러한 시각 전환이 절실함을 느끼게 된다.

“탐라는 지질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해산물 채취와 배 타는 것으로 생계를 도모하고 있습니다”라는 『고려사』의 기록, “오로지 말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등 여러 자료들은 중세 제주의 경제가 농업보다 오히려 해양교역이었음을 말해준다. 자연경제에서 교환경제로, 자급자족경제에서 상품화폐경제로 이행한다는 근대 사학의 과학적 법칙은 여기서 힘을 잃는다. 이미 진보의 공식은 편견이며 신화일 뿐이다.

다시 불러낸 페르낭 브로델
중세의 제주사회를 다룬 여러 사료들은 하나같이 교역경제를 말한다. 화산회토라는 토지의 척박성이 중세 제주도를 비농업경제 사회로 만들었다. 거기에다 섬이라는 지리적 요인은 해양교역을 필연적으로 만들었다. 이는 비단 조선시대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삼국지』위서 동이전에 “배를 타고 왕래하며 中韓에서 무역한다”라는 기사에서 보듯이 고대 이래 중세까지 계속된 현상이었다.


이 대목이 한국사회에서 이미 한물 간 이론처럼 보이는 프랑스 아날학파 그 중에서도 페르낭 브로델이 복권되는 지점이다. 브로델은 우선 ‘장기지속의 역사’를 말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거의 변함이 없는 자연환경의 영향이 그것이다. 흔히 ‘지리적 시간’이라고도 한다. 고대 중세의 제주도가 지리적 요인의 영향으로 장기지속의 해양교역을 일궜던 것은 이에 조응한다. 심층의 장기지속 역사 위로 그보다는 조금 유동성이 있는 ‘사회적 시간’ 즉 ‘콩종튀르(conjoncture)’라 불리는 국면의 역사는 15~17세기 출륙제주민의 현상을 분석하는 데에 유용하다. 물론 브로델 이론으로 중세 제주사를 완벽히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마치 십계명만을 읽고서 성경 전체를 통독한 듯 행세하는 꼴로 브로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에도 3층 구조의 역사를 가져다 쓴 점도 허술한 논리 전개일 수는 있다. 하지만 단순히 사료의 시간대별 나열과 인과 관계 추적만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기존의 방식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농업경제가 아니라 장기간 이어진 해양교역의 경제, 그리고 그것의 변화는 분명 어떤 일정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브로델을 다시 불러낼 여지가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중세 제주 사람들은 처음엔 해산물 교역으로 주된 생계를 이어나갔다. 변화가 생긴 것은 고려말 몽골의 침입 이후다. 100년의 몽골의 직할지를 겪으면서 제주의 경제는 牧馬 경제로 전환한다. 목마 경제의 핵심은 말 사육과 교역이다. 세계 제국 원을 배경으로 제주의 경제는 이때 상당히 활성화된다. 인구 증가가 뒤따른 것은 당연한 결과다.

제주민의 출륙을 강요한 말(馬) 교역 통제
하지만 조선정부가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제주의 경제는 활력을 잃어간다. 말교역을 중앙정부가 강력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제주민은 살 길을 찾아 바다로 나간다. ‘포작인’ 혹은 ‘두무악’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제주유민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이다.
이들에 대한 기존 연구는 이들의 출륙 배경을 단순히 자연재해와 관의 수탈만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연재해와 관의 수탈은 중세 내내 존재했던 출륙 유발 요인이다. 반면 제주민의 출륙은 유독 15~17세기에 집중된다.


그렇다면 그 200년 동안 집중적으로 발생한 출륙유망을 설명할 또 다른 요인을 찾아야 한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그것은 곧 목마경제의 붕괴였다. 중앙집권이 강화된 조선정부가 제주의 富를 독점하고자 나섰다. 그것은 말 자유교역의 금지로 나타났고 이는 제주민의 경제생활을 극도로 피폐화시켰다. 출륙유랑으로 이어진 건 당연한 결과다.


출륙 유랑민의 규모도 적지 않았다. 2~3만으로 당시 제주 인구의 1/3 혹은 1/2 수준이었다. 이처럼 많은 숫자는 출륙유랑이 제주민 전반에 걸쳐 발생했음을 말해준다. 이들의 주 유랑처는 물론 남해안 일대였지만 중국 요동반도 아래의 해랑도까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임진왜란과 제주유민의 삶
토지에의 긴박을 중시하는 중세 정부 입장에서 이들은 쇄환 대상의 불법적 이탈자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해양력은 중세 정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때문에 여러 차례의 쇄환 논의에도 ‘慣知水道者’ 즉 ‘수로에 익숙한 자’라는 이유로 불법 신분이 아닌 半합법 신분을 유지하게 된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실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순신의 장계에 “물결이 험하고 평탄한 것을 알 수 없고, 물길을 인도할 배도 없으며”라며 전문 수로 안내인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첫 전투부터 이들 제주유민 즉 포작인이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게다가 “배를 잘 부려 물결에 달려가는 것이 나는 새와 같으니”라는 실록 기록은 이들의 뛰어난 항해술을 말해준다. 이순신 역시 “건강하고 활 잘 쏘며 배도 잘 부리던 포작”이라고 이들의 항해 능력과 전투력을 언급했다.


하지만 이들의 해양력에 주목했던 것은 비단 조선 수군만이 아니었다. 사료에 종종 등장하는 일본군이 된 포작들은 이런 사정을 말해준다. 이러한 현상은 이들의 용병적 성격, 경계인적 성격을 보여준다. 내셔널 히스토리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 힘들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지적대로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였을 뿐이다. 이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생존이었지, 조국애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조선수군과 일본군을 넘나들며 자신의 해양력을 팔았다.


지금까지 임진왜란 해전사 연구에서 마이너리티(minority)였던 이들을 주목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또한 국가 단위 역사 서술은 조선과 일본을 넘다들던 이들에 대한 접근을 막았다. 이제 변방적 시선, 탈중앙적 시선, 탈국가주의적 시선, 탈육지적 시선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영권 제주 영주고등학교 역사교사
고려대 사학과를 마치고 제주대 사회학과에서 석사와 박사를 했다. 제주역사의 대중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제주역사기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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