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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교양, 무료함에 대처할 수 있는 무기
[문화비평] 교양, 무료함에 대처할 수 있는 무기
  • 조환규 부산대
  • 승인 2002.10.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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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03 01:30:59
조환규
부산대·정보컴퓨터공학부

지금도 교수공채나 승진, 재임용 등의 관련서류를 적다보면 영락없이 취미를 쓰는 란이 보인다. 교수의 취미라…. 이런 란에 솔직하게 자신의 취미를 ‘음주 후 방가’나 ‘휴식 후 수면’이라고 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여하튼 그 취미를 알아내려는 행정당국의 심보가 좀 궁금하다. 퇴폐적인 취미를 가진 사람을 미리 걸러내자는 말인지 아니면 취미별로 분류해서 동호회에 가입시켜주겠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조사에 따르면 가장 보편적인 취미는 독서와 음악감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교수의 취미를 독서라고 하는 것도 그렇다. 책 읽는 것이 필생의 업인 사람이 취미로 책을 읽는다고 해서야 어디 쓰겠는가. 흔하게 음악감상이라고 쓰는 사람이 많지만 이 말 속 정보량은 거의 0에 가깝다. 생각해보니 상당수가 즐기는 낚시란 참으로 잔인한 취미라고 생각된다. 생물의 입에 바늘을 꿰어서 이러 저리 끌고 다니는 것도 부족해서, 더러는 그 자리에서 살을 떠서 먹는다. 생업활동이 아니라 순전히 재미로, 끌려오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고기의 몸짓을 손맛이라고 환호하는 일은 선비로서 할 일은 아닐 듯 싶다. 사냥은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한편 호쾌하게 쇠작대기를 휘두르며 즐거운 담소로서 초원을 걷는 골프는 어떠할까. 남들의 골프를 말리지는 않지만, 몇 년 전 한 TV 고발프로를 보고는 골프에 대한 입맛이 아주 싹 가셨다. 사연인즉 한 골프장 아래에 있는 촌로의 논 전체가 골프장 쪽에서 밀려 내려온 토사로 아주 쑥대밭이 되었는데, 저명한 평가기관에 조사를 의뢰한 결과, “골프장이 그 피해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란다. 그 무지랭이 촌로가 논두렁에 앉아서 검게 탄 손등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습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 풍경은 두고두고 골프에 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찌하든 학내에서 골프 친다고 자랑하는 교수가 드문 것으로 봐서도, 그들만의 리그로 조심스럽게 운영되는 것으로 봐서도 별로 자랑할만한 취미는 아닌 듯하다. 한편 골프에 인생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극찬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디 인생이 골프에만 있으랴. 백원짜리 화투판에도 있고, 묵찌빠에도 있다. 진리란 찾아내려는 사람의 자세에 있는 것일진대, 이를 오해하여 놀이 그 자체에 이미 내장된 것이라고 우겨서는 안 될 것이다. 마치 사물에 아름다움과 추함의 분량이 미리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듯이.

취미란 다른 사람에게도 쉬이 권할 수 있고 그것으로 주위 사람들이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적절한 비용으로 즐길 수 있어야하고, 경쟁적이어서는 곤란하다. 음주 후 방가는 이런 면에서 볼 때 쉬이 권할 수는 있지만 주위 사람 모두에게 즐거움은 주지 못한다. 필자는 한때 맥주를 담는 취미를 가졌는데, 생각하는 것과 달리 담기는 별로 어렵지 않으나, 주조된 전대미문의 맥주를 마시기가 어렵다. 이제는 제법 내공이 쌓여 근처 주당들에게는 큰 기쁨을 주었지만, 집안이 술도가로 변할 것을 우려한 식구들의 집요한 방해로 이미 중단된 상태이다. 최근에는 사진에 취미를 붙여볼까 하는데 사진보다 자꾸 멋있게 생긴 카메라에만 관심이 가서, 장차 이러한 비본질적 취미생활의 말로가 어찌될까 두렵다. 하여 음악보다 스피커와 오디오에 더 관심이 쏠리시는 분들도 각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러셀에 따면 대학교육의 최종목표는 평생 즐길 수 있는 소일거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취업준비기관으로 전락하는 우리네 대학을 보면 우울해진다. 평생을 즐길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은 밥벌이 기술 이상으로 중요하다. 요사인 학생들에게도 재미있거나 개성있는 취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노래방의 등장으로 기타를 배울 필요도 없어졌고, 많은 수의 학생들이 자기 소모적인 사이버게임에 몰두한다. 인터넷 게임은 값싸고 간편하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미소를 짓게 하는 매력은 없다. 한 동료는 늦은 나이지만 저녁마다 피아노를 배우러 간다. 그의 연주는 비록 덜거덕거리지만 항상 감동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악기를 배워보면 다른 사람들의 연주에도 좀 더 진지해지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음악을 느낄 수 있다.

쉬울 것 같지만 정말 참기 힘든 것은 무료함이다. 무료함에 대처하는 수단과 방법은 그 사람의 교양과 품성을 보여주는 매우 좋은 표식이 된다. 적절한 취미로 훈련되지 못한 사람들이 이런 무료함에 대항하는 방법에는 대개는 어이없는 도구나 수단이 등장한다. 대학에서도 끊임없이 학내보직만을 맴도는 분들이나, 정치권에서 장내 외를 들락거리며 배회하는 분들을 보면, 그들에게도 본인과 주위 사람에게 즐거움을 나눠줄 수 있는 적절한 취미를 가져보라고 권하고 싶다. 자신을 위해 투자할 이승에서의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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