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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생명의 밤
벌거벗은 생명의 밤
  • 교수신문
  • 승인 2013.12.30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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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북에서 오랫동안 2인자로 군림했던 장성택이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시인 임화를, 소설가 한설야를 떠올렸다. 스탈린 시기의 공포스런 밤도 생각했다. 그가 공개적으로 비판되고 체포되는 순간에 침묵 속에 앉아 있어야만 했던 사람들도 제각기 내면의 소중한 무언가를 상실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리 중대한 죄를 지었더라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성 속에서 자신에 대해 변호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사건이 우리를 공포스럽게 하는 것은 집단의 형태로 나타난 엄청난 폭력에도 불구하고, 희생자가 끝끝내 완벽하게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의 주인공은 이렇게 외친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우리의 근대사 속에서 이런 비극적인 사건은 수도 없이 많다. 희생자들은 아감벤이 말하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끌려나와 죽임을 당하고 암매장된다. 전후 소설가 서기원의 단편 「안락사론」은 이러한 시대의 비극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후퇴하는 인민군들은 거대한 구덩이 앞에 사람들을 5열종대로 꿇어앉힌 다음 차례대로 그들을 사살해 버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선생 앞의 학교 아동들처럼 순종’하면서 대기하다가 개구리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서 처참하게 죽어간다. 아우슈비츠의 한 생존자는 이 기이해 보이는 순종이 그들이 이미 ‘내면적인 사망’에 이르렀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끔찍한 이야기 속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에 가려진 진상을 드러내면, 남쪽에서도 수없이 많은 그런 비극적인 사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땅은 ‘억’소리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로 가득하다. 그 시대의 험난함을 보여주는 사건 중의 하나가 소위 사법살인이라고 불리는 ‘인혁당 사건’인데, 정작 그런 공포의 시대를 이끌었던 장본인조차 해방기의 격변 속에서 그 격랑의 희생양이 될 뻔하기도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민주화 이후 그런 공포스런 세계가 이제는 믿기지 않는 먼 과거로 사라져버릴 거라는 우리의 믿음과 희망은 너무 순진한 것이었을까. 북한의 현실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고, 남에서는 그것을 핑계 삼아 이른바 ‘불통의’ 권력이 회귀하려 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하는 데 있다. 그 초석이 무너지면 폭력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이념이라는 낡은 유령이 다시 배회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벌거벗은 생명으로 강퍅한 현실 속에 소환될 처지에 놓였다. 우리의 경우에 폭력은 훨씬 간접화되고 교묘하기 쉽지만, 국가기관이라든가 언론 등을 통해 자유롭게 말할 권리가 봉쇄된다는 점은 다를 바가 없다.


대학생들의 안녕하십니까 대자보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정치적 이해득실을 떠나서 이 땅의 젊은이들이 자기 삶보다 더 커다란 고민을 토로하려 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에 대한 비판을 철저히 봉쇄하고 여론을 조작하려 할 때 그 사회는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이미 오래 전에 시인 김수영은 “이북이 막혀 있어 사상이나 언론의 자유가 제물로 위축되기 쉬운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사정은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인간은 스스로의 내면에 진흙탕을 지닌 존재이므로 ‘수정궁’으로 표상되는 유토피아에의 꿈은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하생활자의 수기」라는 소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다. 아주 어렸을 때 우연한 기회에 솔제니친을 읽었는데 그러한 독서를 통해 유토피아에 대한 꿈은 날개를 단 천사이자 동시에 끊임없이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괴물이라는 생각을 지니게 됐다. 인간의 불합리성이 어떻게 폭력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는 김연수의 소설 『밤은 노래한다』 정도가 될까? 순진한 열정은 위험하다. 그러나 열정 없는 삶은 이미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갈등 속에 놓여 있다. 길을 잃고 걸어가는 막막한 어둠 속에서 과거의 유령들이 하나둘 귀환하는 섬뜩한 느낌이다. 힘으로 상대의 입을 막으려는 시도는 언제든 실패할 수밖에 없다. 혼란스럽고 시끄럽더라도, 심지어는 자신의 패배를 기꺼이 감수하면서까지도, 끊임없이 대화하려는 열린 자세가 그립다. 북한의 상황을 악용해 이 땅의 모든 비판을 종북으로 규정하고 그렇게 불만스러우면 북으로 가라거나 하는 단세포적인 반응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은 남과 북의 한계와 모순이 지양된 어떤 곳이며 그것도 한 번에 도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무한히 수렴돼야 할 것이지, 더 나쁜 것과 나쁜 것 중의 양자택일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손종업 서평위원/선문대·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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