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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나간 ‘케이팝’은 어떻게 한반도로 되돌아 왔을까
세계로 나간 ‘케이팝’은 어떻게 한반도로 되돌아 왔을까
  • 교수신문
  • 승인 2013.12.30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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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을 읽는 하나의 독법

▲ 2011년 당시 페이스북에 개설된 ‘WorldWide KPOP Day’ 이벤트 페이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는 신현준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중음악과 대중문화’ 전문가다. 그가 최근 펴낸 『가요, 케이팝 그리고 그 너머』(돌베개 刊, 316쪽, 18,000원)는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공간’을 횡단하는 사유의 모험이 잘 그려져 있다. 흔히 케이팝(K-pop)시대로 불리는 지금, 신 교수는 역사·정치와 접속하는 ‘가요’를 경유해 인디음악의 대안적 라이프스타일을 탐색하는 등 다채로운 ‘대중음악’ 깊이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책 부제로 ‘한국 대중음악을 읽는 문화적 프리즘’을 달았다. 그는 케이팝을 ‘글로벌 구성물’로 이해하면서, 그 지리적 순환의 의미를 예리하게 읽어냈다. 「케이팝의 ‘케이k’, 기억의 삭제 혹은 역사의 복수」가 그에 해당하는 글이다. 관련 부분을 발췌했다.

더도 말고 사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조용필은 일본, 한국, 홍콩의 톱스타 3인이 주축이 돼 조직한 음악 페스티벌 「팍스 뮤지카 ’87 서울」에서 록 스타일의 곡 「아시아의 불꽃」을 연주했다. “아시아의 젊은이여”라고 시작하는 노래의 가사는 “사랑도 하나 마음도 하나/ 우리의 숨결도 하나/ 여기 모여서 같이 가리라/ 우리의 노래를 부르리라”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회고해본다면 1980년대까지는 이런 유형의 노래를 만들고 불러야 한다는 무언의 분위기가 지배했던 것 같다. 실제로 「팍스 뮤지카 ’87 서울」의 오프닝은 “아시아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음악을 통해 평화와 우정을 나누는 평화의 대제전”이라는 선언으로 시작됐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명시적으로 요구했든 아니든, 아시아에서 개최되는 국제행사라면 평화와 화합을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는 대중음악이 아무리 탈정치적이고 탈역사적이라고 하더라도, 당시 아시아에서는 역사와 정치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은 곤란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아시아의 젊은이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서로 훨씬 가까워졌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형식적이라도 ‘아시아는 하나’라고 진지하게 상상하는 젊은 아시아인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최소한 이런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창작하고 연주하려는 아시아의 스타는 더더욱 없는 것 같고, 팬들도 저런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21세기의 한류·케이팝 나아가 케이팝이 매개하는 아시안 팝은 20세기 아시아 대중문화에 남아 있던 정치와 역사를 삭제하고 있고, 식민주의, 냉전, 국가주의 등의 기억과 정체성을 지우고 있다.


이렇게 해 역사적 망각과 취향의 자유는 교환된다. 경계를 넘는 문화적 흐름이 민족 감정의 출동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지만, 이런 충돌은 팝의 열광에 비한다면 부차적으로 보인다. 2004년부터 매년 한국에서 개최되는 「아시아 송 페스티벌(Asia Song Festival)」의 홈페이지에는 “아시아는 하나다(Asia is One)”라는 ‘유구한’ 표어가 여전히 붙어 있다. 그렇지만 이런 표어는 실제로 벌어지는 현상과 괴리가 크다. 아시아 최고의 스타들은 국가를 대표한다는 생각이 없으며, 아시아 각지에서 온 팬들은 아시아 최고의 연예를 즐길 따름이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간 아시아의 젊은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이 즐겼던 스타들의 정보를 검색하고 웹사이트 여기저기에 사진을 올리고 글을 남길 것이다. 그 스타가 어디서 왔는지, 즉 스타의 국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최고인지가 중요하다. ‘케이’라는 접두어는 ‘코리안’의 축약어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버린다. 그건 그 자체 현 단계 아시아에서의 트랜스내셔널한 교잡과 글로벌 이접의 기호다.


그런데 아시아를 벗어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접두어 ‘케이’는 ‘코리아’라는 상징과 재접속된다. 2011년 6월 SM타운의 파리 콘서트에 대해 <르몽드>가 “음악을 수출가능한 제품으로 만든 제작사의 기획대로 만들어진 소년과 소녀들이 긍정적이며 역동적인 국가 이미지를 팔고자 하는 한국 행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 진출한 것”(2011년 6월 11일)이라는 기사가 나왔을 때, 한국인들은 크게 반발했다. 이에 대한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대답은 “정부 지원으로 케이팝 열풍이 일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단순한 것이었지만, 한류와 국가 브랜드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무수한 담론이 공공연히 생산된 상태에서 케이팝과 국가주의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다’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이것이 단지 아시아를 타자화하는 서양의 시선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곤란하다. 한국계 한국학자 존 리는 케이팝의 ‘케이’가 “1960년대 이래 수출지향적이었던 남한 정부의 브랜드, 즉 브랜드 코리아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또 한 국내 평론가는 케이팝에 대해 “‘성실과 노력의 판타지’와 ‘근면 이데올로기’를 통해 노동력을 집약하고 여타의 문제를 타개하려 했던 ‘경제성장 신화’의 문화적 버전”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한국의 개발국가 이미지와 브랜드가 경제의 영역을 넘어 문화의 영역까지 확장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케이’가 함축하는 ‘코리아’가 종종 남한을 넘어 한반도 전체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한 예로 <가디언>은 서양인의 싸이에 대한 웃음이 애니메이션 「팀 아메리카: 세계경찰(2004)」에 나온 김정일을 대상으로 하는 웃음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썼다. 기자가 무리한 면이 있지만, 싸이를 비판했다기보다는 싸이를 보는 서양인의 시선을 비판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싸이와 김정일이 연동되는 무의식적 상징작용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단과 냉전의 효과는 ‘미시적 문화정치’에서는 중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거시적 정치문화’에서는 아직도 중요한 것이다.


2012년 5월 ‘북한판 소녀시대’라는 제목으로 북한의 소녀악단에 관한 이런저런 기사가 실렸다. 그 가운데 한 언론은 “소녀시대 멤버가 어릴 적부터 선발돼 연습했듯이 이들도 대외 선전용으로 어려서부터 장기간에 걸쳐 훈련된 전문 예능인들이다”(<코리아타임스>, 2012년 5월 20일)라고 보도했다. 2012년 11월 모란봉악단으로 밝혀진 이 악단은 소녀시대가 「소원을 말해봐」로 활동할 때 입었던 해군 제복 차림, 이른바 ‘마린 룩’과 유사한 복장을 입고 나와서 다시 한번 화제가 됐다(<조선일보>, 2012년 11월 3일). 소녀시대를 모란봉악단과 비교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비슷한 복장을 차려입은 남한 민간인과 북한 군인의 ‘칼동작’은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른 것일까. 남한과 북한이 그토록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하다는 것이 서양인의 편견이자 타자의 시선이라면, 그 차이를 드러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케이팝 글로벌화의 마지막 게임일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만약 당신이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혹시 적대를 재생산하는 것은 아닌지도 질문해야 할 것이다. 글로벌 구성물인 케이팝은 한반도 남쪽에서 시작해 아시아와 세계를 횡단한 뒤 다시 한반도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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