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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은 공동체와 緊結 … 지금, 신랄한 자기비판이 필요하다
학문은 공동체와 緊結 … 지금, 신랄한 자기비판이 필요하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3.12.17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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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병 서울대 교수가 말하는 ‘학문론’


<오늘의 문예비평>이 마려한 특집 ‘우리시대의 공부론’은 우리에게 주체적인 학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학문, 삶, 글쓰기」(박희병), 「앎과 삶이 함께 가는 조동일의 학문세계와 논쟁적 글쓰기」(임재해), 「김영민의 공부론」(이왕주), 「사상하는 자의 윤리」(박형준) 등을 실었다. 특히 박희병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는 학문주체성을 자신의 언어와 개념, 이론의 응집으로 보면서 한국학문의 자생적 기반이 취약한 데는 학문의 종속성과 식민성 문제가 도사려 있음을 지적했다. 그가 말하는 학문적 주체성이 어떤 의미인지 관련 부분을 발췌했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학문’이란 ‘배우고 물음’을 뜻한다. ‘배운다는 것’은 누구 혹은 무엇으로부터 이뤄지는 행위다. 다시 말해 배움의 대상이 존재한다. 이점에서 학문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행위가 아니라 유에서 새로운 유를 창조하는 행위에 가깝다. 학문에 스승이 필요한 것, 학문에 師承의 계보 같은 것이 있음은 바로 이에 연유한다.
‘묻는다’는 것은 누구를 전제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누구를 전제할 경우 그것은 누구에게 묻는 행위다. 누구는 스승일 수도 있고, 벗일 수도 있고, 대립적이거나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한편 전제된 누군가가 없을 경우 그것은 스스로를 향한 행위다. 다시 말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인 것이다.

학맥 부재의 근대한국학문, 자생적 기반 취약
두 경우 모두 앎에 대한 욕구, 진리에 대한 갈구가 자리하고 있음은 동일하다. 또 두 경우 모두 물음에 대한 응답이 수반되게 마련이라는 점에서 상호적이며 대화적이라는 공통성을 갖는다. 주목해야 할 것은, 물음이 갖는 이 상호성과 대화성의 출발점에 ‘나’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서 우리는 ‘학문’의 한 축을 이루는 물음이 ‘주체’의 물음, 달리 말해 ‘주체’의 내적 요구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근대의 한국학문에는 學脈이 뚜렷이 존재했다. 주자학은 주자학대로, 양명학은 양명학대로, 실학은 실학대로 학문의 계보가 있었다. 학문에 계보 혹은 전통이 존재함은 학문의 향상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이와 달리 근대의 한국학문에는 학맥이라 할 만한 것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근대 한국의 경우 전근대와 또 다른 의미에서 학문의 ‘자생적’ 기반이 취약함을 의미한다. 근대 한국의 학문에서 진정한 의미의 ‘학파’를 운위하기 어려움은 이와 관련된다. 비록 한국의 전근대와 근대는 학문의 사회적 기반이 그 영위 방식이 판연히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학파의 존재 양태나 학맥의 발전적 계승양상의 점만 갖고 논할 경우 근대의 한국학문은 전근대의 학문보다 꼭 낫다고 하기 어렵지 않은가 한다.
학문은 그 본질상 묻는 행위와 관련돼 있음으로 학문 ‘주체’의 문제가 關鍵的 중요성을 갖는다. 학문은 학문 주체의 요구, 지향, 고민, 관심, 의식의 결과임으로서다.


학문 주체는 시공간과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특정한 시공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시공간과 교섭하면서 묻고, 사유하고, 답을 구하고, 글을 쓴다. 주체를 규정하거나 에워싸고 있는 이 시공간은 그러므로 적어도 학문에 있어서는 주체와 대등한 중요성을 갖는다. 주체가 중요한 그만큼 시공간의 중요성도 提高된다. 시공간이 전제되지 않는 주체란 존재할 수도 없거니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학문에서 문제되는 시공간이란 본질적으로 ‘지금 여기’다. 모든 학문은 ‘지금 여기’에서 출발하고, ‘지금 여기’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문은 성과 주체성을 그 생명으로 삶을 수밖에 없다. 모든 학문은 그 본질에 있어서 현재적이며, 또한 주체적이다. 여기서 ‘주체적’이라 함은 이중의 含意를 갖는다. 하나는 연구 주체와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연구 주체를 에워싼 시공간과 관련된다.
학문은 현재성과 주체성을 그 생명으로 삼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나 미래와 무관하거나 주체성 바깥의 주체성들, 즉 또 다른 주체성들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학문, 학문의 본령에 충실한 학문은 오히려 현재의 요구에 충실하면서도 과거와 미래를 늘 문제삼으며, 과거와 미래 속에서 현재를 응시한다. 과거는 현재의 과거요, 미래는 현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과거와 미래는 또 다른 현재이며, 현재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고려 없이는 이해될 수 없으며, 전망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학문의 현재성은 과거에 대한 심원한 문제의식과 미래에 대한 깊은 고려가 수반될 때에만 제대로 학보될 수 있다.
한편, 학문의 주체성은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주체성들을 향해 열려 있으며, 그들과 대화적 관계를 형성한다. 학문의 주체성은 그 바깥의 주체성들에게는 진리인식의 제약이 되기도 하나 동시에 진리인식의 준거가 되기도 한다. 이 점에서 학문의 주체성은 진리의 보편성을 만들어나가는 불가피하면서도 의미 있는 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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