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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조선인’ 아비투스가 만들어낸 반지성주의 극복 모색
‘강한 조선인’ 아비투스가 만들어낸 반지성주의 극복 모색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11.25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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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대결하는 근대 한국인의 탄생 조명한 최정운 서울대 교수

1999년『오월의 사회과학』(오월의 봄 刊)으로 5·18광주민중항쟁을 확고부동한 학적 언어로 정립했던 최정운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가 14년 만에『한국인의 탄생』(미지북스 刊)을 들고 돌아왔다. 사뭇 거창해 보이는 제목의 책에서 최 교수는 한국 근대사상사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근대 소설문학에서 창조돼 나타난 일련의 인물들을 분석하고 해석했다. 그런데 정치학자가 문학텍스트를 연구한다? 게다가 이 작업으로 ‘한국인’의 정체성까지 밝혀낸다니! 여느 정치학자의 연구와는 확연히 다르다. 문학자나 사상가가 할 일을 한 셈이다. 궁금한 마음이 일어 첫눈이 내린 지난 18일 오후 서울대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최 교수의 이번 저서 집필 계기를 찾으려면 결국『오월의 사회과학』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간략히 그 이전의 그의 학문 여정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 교수는 서울대에서 학부를 마치고 시카고대에서 석·박사를 했다.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의 노동통계발달에 대한 정치적 의미를 다뤘던 그의 졸업논문은 1992년 귀국 후『지식국가론』(삼성출판사 刊)으로 출간됐다. 그가 모교에 임용돼 서양 정치사상 강의를 하던 1995년 무렵은 한국정치사상학회가 창립됐고, 전파학회에서 근대사상사를 다시 보려는 움직임이 태동하던 시기였다. 이런 학계의 분위기 속에서 1997년 갑자기 떠맡다시피 시작한『오월의 사회과학』집필 작업으로 역시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힌다. 우리 사회를 제대로 보는 것이 지성인이 해야 할 근본적 임무인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가 느낀 학계 현실은 참혹했다. 외국에서 비교정치 같은 학문 방법론을 전공하고 귀국해서 한국의 사상,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문제 연구의 첫 발을 내딛었던 5·18연구를 통해 그는 우리에게는 우리사회의 근본적이고 실존적인 지적 문제가 있음을 파악했고, 이는 외국에서 배워오고 외국 이론을 도입하는 것이나 전문 분과 학문에서의 방법론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오월의 사회과학』이후 10여 년의 지적 여행에서 그는 “외국의 이론을 도입해서 그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이른바 ‘소외’의 절정임에 틀림없다”라고 단언한다.

『한국인의 탄생』은 그런 면에서 수입 이론을 쓰지 않고, 시대별 근대 한국 소설에 나타난 작중 인물을 분석한 결과를 작가에게까지 확대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서구와는 달리 이론적, 철학적으로 자신이 살던 사회의 문제에 대해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 체계적인 저술이 우리의 근현대 역사에는 거의 없다”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왜 문학텍스트인가? 그는 1863년 고종이 즉위한 때부터를‘근대’로 본다면, 40여 년이 지난 1906년에야 ‘신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문학이 풍성해졌음에 주목했다. 또한 근대 소설문학의 원칙으로서의 ‘사실주의’도 당대의 시대상과 작가의 문제의식을 잘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했다는 점도 최 교수가 소설을 주요 연구 텍스트로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외국 이론으로 우리 문제 보는 건 ‘소외’의 절정

그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추적하기 위해 인용한 소설의 면면을 보자.『 홍길동전』(허균),『 춘향전』,『혈의 누』(이인직), 『꿈하늘』(신채호), 『무정』과 『유정』(이광수), 『배따라기』와『약한 자의 슬픔』(김동인), 『날개』(이상), 『탈출기』(최서해), 『무영탑』(현진건) 등 모두 32권의 근대소설을 다뤘다.

모든 근대 소설을 다 다룰 수는 없었기에 그는 몇 작품을 선정해 작중 인물의 모습과 그들의 역사적 의미에 초점을 맞췄다. 작품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작가가 작품을 집필한 시기에 기준을 뒀다. 소설이 가리키는 역사적 시대는 의미 있는 요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는 “그 시점에서 문학가에게 인식된 사회적 현실과 사상이야말로 의미 있고, 이 책을 통해 찾으려는 보화다”라고 말하며 작가가 소설에 부여하려 했던 시각, 틀, 문제의식을 도출해내고자 했다. 그렇게 구성해낸 책의 목차는 자못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홍길동과 성춘향 △신소설의 인물들과 그들의 세상 △초기 민족주의자의 두 초상 △만세 후에 찾은 인물들 △대도시 지식인의 출현 △새로운 전사의 창조 △민중영웅의 창조 순서로 읽어가다 보면 한국인의 아비투스가 형성된 과정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몇 부분을 따라가 보자. 저자는 우리 민족이 모두 위기에 처했을 때 찾을 수 있는 구세주로 홍길동을, 권력이 우리를 핍박할 때 찾을 수 있는 존엄한 사랑의 화신으로 성춘향을 분석해냈다. 전통적 질서가 완전히 붕괴된 상황에서 이광수를 비롯한 개화민족주의자들이 지배 계급 자리를 어떤 명분과 전략으로 찾아가는 지를『무정』의 ‘이형식’을 통해서 드러낸다. 또한 정반대편에 서 있는 신채호의『꿈하늘』에서 그는 상상의 전체주의 세상으로 회귀하려는 ‘한놈’의 공허한 진정성을 끄집어낸다. 1910년대의 초기 민족주의자의 두 초상을 통해 “그들의 정체의 형식을 채울 내용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공통점을 읽어내는 데서 정치학자의 예리한 시각을 엿볼 수 있다.

『홍길동전』부터 김동인, 이광수의 작품들을 거쳐 현진건의『무영탑』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소설 속 인물(허구)과 작가(현실)를 교차시키며 분석한다. 최 교수는 “작가의 시각을 벗어난 작중 인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작중 인물 중에 현실적으로 있는 인물도 있고, 사회에 보이는 인물도 있지만, 사회에 있어야할 사람도 작가는 그려낸다.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이 혼용돼 있는 것이 현실적인 모습이다”라고 문학텍스트에서 시대와 당대를 살아가던 한국인을 읽어냈다. 이런 방식의 문학연구는 확장된 문학사회학의 지평이라는 점에서 문학 연구자들에게 좋은 자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해석적인 면에서 보여준 새로운 가능성도 있지만, 실증적 자료로 활용되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최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문학 연구자들은 보통 작가의 문장, 작법, 플롯 구성 방식을 본다. 나는 그것보다 이야기 자체가 무슨 의미를 갖는지에 주목했다. 『임꺽정』을 쓴다고 해서 중종, 명종 때 역사적 사실을 그 작품을 보고 안다는 것은 오류다. 역사적 사실을 추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느낀 현실적 감각, 이상, 비판적 감각을 보려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사상사를 일궈낸 것이다. 사상에는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업은 우리 생각을 파고드는 일인데, 보통 생각하는 사회과학 방법론과도 상당히 거리가 있다.”

20쪽이 넘는 참고 문헌으로 근대 소설문학에 세밀하게 돋보기를 댄 최교수의 결론은? ‘강한조선인’을 추구한 대가로 1930년대부터 ‘반지성주의’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는 “근대의 신지식인은 일본과 서구에서 지식을 수입함으로써 선생, 지도자가 되겠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지식의 수입상’일 뿐 원래 우리가 알던 ‘선비’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당시 대중은 지식인들 중 많은 이가민족을배신하는모습을목도했고,『 무정』의 ‘배 학감’처럼 ‘장사꾼’같은 사람임을 경험했다. 최 교수는 지식인들이 스스로를 재정의하며 민족에 대한 의무를 하려고 했지만, 현실의 벽에서 좌절하고 회의를 갖기도 했던 생각들이 모여 반지성주의를 탄생시켰다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그는 “이런 반지성주의야말로 해방 이후 우리 민족끼리의 목적 없는 잔인한 싸움을 부추기고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덧붙인다.

진정한 학문하기의 표본 절실해

그는 마치 ‘저주의 안개’처럼 형체도 없는 반지성주의를 가장 몸으로 잘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지금의 학계를 꼽았다. 그는 “교수는 교수대로 깊이 들어가는 학문 자체에 관심이 없고, 학생들도 대학에 들어오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막상 입학해서는 무얼 배우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학부모는 더 심하다. 고시 패스하고 학점 잘 받을 생각만 하지, 학문 잘 한다는 것에 대해 우리 사회는 무관심하다. 공부는 외국 가서 하면 된다는 식이다. 반지성주의 그 자체인 셈이다”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최 교수의 학계에 대한 질타는 계속됐다. “우리나라의 중요한 사건들, 이를테면 3·1운동, 4·19, 5·16 등을 사람들이 다 뻔히 아는 걸로 생각한다. 교수나 박사 수준에서의 연구가 안 되고 있다. 또 이광수를 친일파라는 이유 하나로 연구하지 않는 것, 박정희를 유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폄하하는 태도도 반지성주의의 한 측면이다.”

그가 생각하는 대안은 뭘까. “이렇게 다이나믹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냐고 외국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한국 학자들 사이에서 역사에 대한 합의가 안 되는 것은 역사를 ‘교과서 수준’에서만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을 보지 말고, 민주주의, 자유주의라는 이념사가 아닌 더 깊숙이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면 공통의 정서와 문화가 나올 것이다. 그렇게 진정한 학문하기, 학문의 표본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지성이 뭔가 알지 않을까?”

반지성주의가 어쩌면 식민지를 겪은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고민도 했다는 최 교수. 이번에 출간된『한국인의 탄생』은 해방 이전까지의 소설문학을 통해 ‘강한 한국인’의 이유를 추적해냈다. 그는 이미 해방 이후 작업에도 착수했다. 내년 안에 초고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벌써부터 그의 두 번째 책이 기다려진다.


글·사진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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