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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물적 명칭인 ‘삼지엽’ 틀렸다 … 그것은 ‘솔개문’·‘수리문’이다
즉물적 명칭인 ‘삼지엽’ 틀렸다 … 그것은 ‘솔개문’·‘수리문’이다
  •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서예가
  • 승인 2013.11.1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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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 14. 신라 金製허리띠[銙 帶]


▲ [그림4] 황남대총 북분 금제허리띠, 5세기, 길이 120.0cm, 국보 제192호, 1973년 발굴.

 “허리띠장식의 기원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에까지 소급되는 것으로서 유목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허리띠에 차고 다니던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가 되면 허리띠장식은 권력과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변화하며 신분에 따른 재질과 장식의 차이가 뚜렷이 나타난다.” (『한국고고학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銙帶는 소재에 따라 金帶, 銀帶, 玉帶, 犀帶, 石帶, 角帶 등으로 나눈다. 과대는 布帶를 모체로 하여 옷을 여미고 몸을 보호하는 구실에서 지배계급의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장신구로 변천되면서 양식이 복잡해지고 실용성보다 의식적 주술적 의미를 지닌 상징물로 사용됐다. 과대는 銙板(띠꾸미개)으로 연결된 띠에 曲玉, 물고기, 새, 도끼, 透彫圭形, 숫돌형, 쪽집게형 등의 사냥도구를 변형 축소한 조형물을 매달아 놓았다. 과판은 심엽형, 타원형, 방형의 판에 주로 당초문, 운문, 연화문 등을 투각하거나 타출 기법을 이용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와 같은 허리띠장식에 대한 설명에서 허리띠장식의 조형이 상징하는 의미를 해석한 글은 단 한 줄도 볼 수가 없다. 尹善姬 씨의 「삼국시대 과대의 기원과 변천에 관한 연구」(『三彿 金元龍 교수 정년퇴임기념논총Ⅱ』, 1987)는 허리띠의 형식분류와 변천을 가장 심도 있게 연구한 논문이지만, 그 논문에서도 장식문양의 상징에 대한 해석부분은 찾아볼 수가 없다. 금제허리띠는 금관과 같이 그 시대 문화의 정점에서 고대사상을 집약한 유물이다. 그런데 그런 유물에 대한 설명을 모양이 무엇과 같이 생겼다거나 달린 장식이 몇 개이며 크기가 몇cm라는 정도의 형태분류에만 그치고 있는 현상은 우리나라 해석고고학의 취약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번 호는 신라 금제허리띠의 조형원리를 해독해 종전에 밝혀내지 못한 신라의 금속허리띠인 과대에 대한 상징과 해석을 처음으로 시도해보고자 한다. 그래서 삼국시대 허리띠장식은 어떤 고대사유가 반영된 조형인가? 도대체 거기엔 어떤 상징적 의미가 내포돼 있는가? 여기에 의문의 포인트를 두고 탐색을 진행해 다른 시각으로 분석을 해봄으로써 고대유물에 내장된 정보를 드러내고 유물의 발언을 듣고자 한다.

 
금제허리띠는 찬란한 신라 금관과 짝을 이루어 공반 출토되는 중요유물이다. 그 화려함도 금관 못지않다. 머리꼭대기의 금관, 허리부분의 금제허리띠, 맨 아래 발부분의 금동신발, 이 세 가지가 신체의 상중하 삼등부위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고대의 어떤 중심사상이 문양으로 조형화돼 나타나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 연구의 단초가 됐다. 冠이나 허리띠에 비해 신발은 아직 金製가 출토된 예가 없다. 金銅飾履만 있고 金製飾履이 없는 이유는 아직 미상이다. 지방의 수장급들은 金이 아닌 銀이나 金銅으로 된 冠이나 허리띠, 신발 등을 갖췄는데, 그 상징성은 대체로 金製와 비슷한 것으로 추찰된다.


신라 금제허리띠는 지금까지 총 6점이 출토됐다. ①금관총 ②황남대총 북분 ③황남대총 남분 ④서봉총 ⑤금령총 ⑥천마총 금제허리띠가 그것이다. 그중 황남대총 남분에선 금관은 없고 금제허리띠만 출토된 점이 색다르다.


금제허리띠의 장식성은 초기의 단순·간결한 양식에서 점차 복잡·화려한 양식으로 변화하면서 5~6세기에 걸쳐 약 100여 년간 사용되다가 그 이후엔 점점 퇴화돼 소멸됐다. [그림2]의 금관총 출토 금관과 금제허리띠는 신라 금관과 금제허리띠 중에서 가장 화려한 장식성을 보여주는 최고의 걸작이다. 이런 국보는 초기의 간결한 양식에서 화려한 양식으로 완벽하게 진화된 것이므로 5세기의 편년을 6세기로 수정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봉총 금관과 금제허리띠 역시 양식적 변화가 비교적 화려해졌다. 따라서 5세기 편년을 6세기로 수정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그런데 『한국의 미? 고분미술』(중앙일보사, 1985)에선 6세기로 비정했으나, 국립경주박물관 편 『新羅黃金』(국립경주박물관, 2001)에선 5세기로 비정해 혼선이 빚어지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금제허리띠 띠꾸미개의 중심문양인 이른바 삼지엽의 기원과 상징에 대한 해석은 고대문화를 해석하는 핵심적 키워드이지만, 기존의 해석은 그 문제점을 충분히 해결하지 못했다. 금제허리띠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금관과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는 중요한 유물이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두 가지 유물은 신체의 상하를 꾸미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대사상의 음양원리가 거기에 작용했을 것이란 점에 대해 특별한 유의를 요구한다.

금제허리띠 띠꾸미개 삼지엽의 기원과 상징
즉 금관이 왕의 天上觀을 대변한 것이라면, 금제허리띠는 왕의 天下觀을 대변하는 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근거로 금관이 태양숭배사상을 문양화한 화염무늬를 중심문양으로 삼고 있는 점에 비해, 금제허리띠는 태양의 등가물인 地上의 솔개를 神鳥化해 중심문양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장식성이 서로 대비된다.


그뿐 아니라 [그림6]처럼 금제허리띠의 띠드리개[腰佩]에 매달려 있는 佩飾 중엔 물고기를 빠짐없이 장식해놓고 있는데, 물고기는 地靈의 상징인 陰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할 것이다. 패식들을 유목민의 사냥도구를 변형 축소해 매단 것을 기원으로 본다면, 왜 짐승의 모형은 없고 물고기만 있느냐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금관에 금제허리띠를 착용한 왕의 모습은 단순히 위세만 드러내기 위한 차림이 아니라, 군왕이 갖춰야할 天地人 三才의 조화로운 德을 표상하고자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금관은 天格을, 금제허리띠는 地格을, 왕의 신체는 人格을 표상함으로써 三才의 德과 格을 군왕이 완성하고자한 고대 신라사상의 이상을 왕의 복식에서 추구하려는 것이 신라의 금관과 금제허리띠의 또 다른 함의와 상징이라고 해석한다.


[그림8]은 황남대총 북분 금제허리띠의 부분이다. 이 그림의 사각형 띠꾸미개에 표현된 문양을 지금까지 모든 연구자들은 삼지엽이라고 불러왔다. 그것은 인동초 문양이 간략화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이한상, 『황금의 나라 신라』, 김영사, 2004. / 『신라황금』도판 설명, 국립경주박물관, 2001).
그러나 세 가닥 잎사귀 문양이 왜 금제허리띠의 장식문양이 됐으며, 인동초 문양이 간략화된 것이 삼지엽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그런 것에 대한 설명을 어디에도 밝혀놓은 데가 없다. 그 까닭은 선학들의 문양에 대한 誤讀을 비판 없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8]에서 상단에 있는 사각형 띠꾸미개 안에 양각으로 표현된 이른바 삼지엽이라고 하는 녹색으로 색칠한 부분(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색칠함)은 새 숭배사상을 반영한 솔개 문양을 상하단으로 배치해놓은 조형이다. 상단은 두 개의 과판을 이은 부분에 역으로 솔개문을 배치했고(색칠 부분), 하단은 하나의 과판 안에 솔개문을 정상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상하 두 마리의 솔개가 서로 조응된 형태로 꾸며진 장식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조형적 분석이 없이 그저 막연하게 인동초 문양이 간략화된 삼지엽이라고 뭉뚱그려 설명함으로써 이 문양에 대한 원의를 읽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다. [그림9]에서 볼 수 있듯이 아래 드림부(원환부)의 도려낸 부분을(검은 부분) 기존학계는 역심엽형이라고 불러왔다. 역심엽형이란 심장형태의 모양을 거꾸로 해놓았다는 얘기인데 정상위치로 봐도 필자의 눈엔 그것이 심장 형태로 보이지는 않는다. 쫙 편 부채살 같은 이 모양은 馬具나 방패 또는 관모 등에 시문된 예가 흔하다. 그러면 이른바 역심엽형이라고 하는 이 문양의 상징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윗부분의 솔개문양과 동일한 문양으로 읽고자 한다. 사람의 눈은 도려낸 부분이 잘 인식되지 않고 남은 부분이 먼저 들어오기 때문에 검은 색의 투공부분을 잘 읽어내지 못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솔개문을 역으로 배치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역으로 배치한 까닭은 아래의 드림부가 땅을 향한 조형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금제허리띠의 조형원리는 반드시 금관과 비교해 고찰해야 된다. 상하가 대를 이루는 복식이기 때문이다. 금제허리띠를 종합적으로 볼 때 태양의 등가물인 솔개가 중심문양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왕이 착용하는 의례용 허리띠이므로 우두머리를 상징하는 수리문양을 낱낱이 시문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런 문양의 기원을 晉이나 北齊시대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으며, 한국에선 백제에서 기원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尹善姬,「삼국시대 銙帶의 기원과 변천에 관한 연구」,『삼불김원룡교수 정년퇴임기념논총Ⅱ』, 1987). 그런가하면, 그 기원은 직접적으로 고구려에서 찾을 수 있으나 선비족 왕조인 삼연 문물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도 제시됐다(이한상, 『황금의 나라 신라』, 김영사, 2004). 그러나 사실 이 문양은 [그림10]처럼 BC 3500~BC 2200년대의 反山 墓葬(浙江省 余杭)에서 출토된 玉鳥들이 그 先形이 된다.

1986년 長江 하류 양저(良渚) 문화에 속하는 신석기시대문화 遺址에서 태양숭배와 새숭배사상이 복합 상징된 玉器들이 대거 출토된 바 있는데, 이 玉鳥들은 그 유물 중의 하나다(『良渚文化硏究―紀念 良渚文化發現 60週年 國際學術討論會文集』, 浙江省文物考古硏究所編절, 1999). 반산출토 옥조들의 형태는 그 지역 태양과 새 숭배 족단들이 새 중의 왕자인 솔개를 반추상적으로 造型한 모습이다. 새 숭배사상에서 유래된 이런 유물이 이른바 삼지엽으로 일컫는 문양의 기원이 됐을 것으로 본다.

솔개는 수리, 소리개로 병칭되는 새다. 정상, 우두머리, 으뜸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으로 환두대도와 같은 君將들이 소유한 무기류의 문양이 됐다. 따라서 이른바 삼지엽 식의 명칭은 이 문양의 상징성을 똑바로 읽어내지 못한 즉물적 명칭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문양의 상징성이 제대로 해석된 새로운 명칭으로 개칭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유물의 상징적 함의와 전혀 부합되지 않은 ‘삼지엽’과 같은 명칭을 폐기해 그 명칭이 표방하는 이미지의 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우리의 고대문화에 대한 올바른 시야가 열린다. 따라서 삼지문을 ‘솔개문’이나 ‘수리문’으로 개칭할 것을 제안하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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