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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하이라이트
굿바이 하이라이트
  • 교수신문
  • 승인 2013.11.19 1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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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릴레이 에세이

나는 스포츠를 하는 것도 보는 것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그래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경기가 있게 마련이니, 그럴 때는 경기 결과도 알고 주요 장면도 보기 위해 뉴스 꼬리에서 방송하는 ‘스포츠 하이라이트’를 즐겨 보곤 했다.

시종일관 박진감 넘치는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야구 하이라이트에서는 안타나 홈런이 터지고, 홈인해 동점이 되거나 역전이 이뤄지고, 믿기 어려운 멋진 수비 장면이 연달아 나온다. 축구 하이라이트에서는 그림같이 패스가 연결되거나 단독으로 돌진해 멋진 골이 들어가는 장면이 계속 되풀이된다. 농구 하이라이트에서는 2점 슛과 3점 슛이 쉬지 않고 터진다. 그밖에 다른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하이라이트 방송을 통해 보는 스포츠는 얼마나 다이나믹하고 극적이었던가!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 한 가지 습벽이 자리잡아가는 것을 느끼게 됐다. 갈수록 본경기 중계방송이 보기 싫어지는 것이었다. 야구 본경기를 보노라면 안타, 홈런, 홈인, 멋진 수비 등이 나오기까지 기나긴 소강상태가 견디기가 힘들 만큼 답답했다. 1회부터 9회까지, 때로는 연장전까지, 최소 두 시간에서 길게는 세 시간 넘어까지 진행되는 긴긴 경기 시간 동안, 관중을 열광하게 하는 시간은 사실 몇 분 되지 않을 것이었다. 하이라이트는 바로 그 시간만 걸러내 편집해 보여주는 것이다.

가만 생각하니 그 여파가 결코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스포츠 하이라이트만 보고, 스포츠는 그런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야구라는 것이 그렇게 쉴 새 없이 안타와 홈런이 터지고 점수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축구라는 것이 그렇게 끊임없이 멋진 패스와 골이 터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 멋진 순간과 장면이 있기 위해 하염없이 이어졌을 무료와 소강의 시간은 과연 그렇게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 가슴이 끓어오르고 저절로 일어나 춤추게 하는 그 멋지고 신나는 장면은 사실 기나긴 기다림이 시간이 쌓이고 쌓여서 이뤄진 것이다. 그 시간도 엄연하게 경기의 일부로 간주돼야 하고 조명받아야 한다.

내가 종사하는 연구와 학습은 대체로 지나간 옛것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혹시 내 연구와 학습도 그동안 너무 하이라이트만 밝힌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예를 들어, 중국 송나라 때 東坡 蘇軾(1037~1101)이 옛 삼국시대 격전지 적벽을 방문해 노래했다는 「赤壁賦」는 역사의 명암과 인생의 喜怒哀樂을 기막히게 기탁한 명작으로 일컬어지며, 중국문학사상 명작을 꼽으라면 「적벽부」를 꼽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중국에 적벽이라는 지명이 여러 곳 있으며 당시 소식이 방문했던 적벽이 실제 삼국시대 격전지는 아니라는 것이 정설인데, 여기서 논의의 대상은 아니다).

소설에서는 80만 명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25만 명이었다는 조조의 군대는 당시 조조의 근거지 許昌을 출발해 荊州 적벽까지 최단 거리 500km가 넘는 길을 행군했다. 이 전쟁을 하이라이트로 보자면, 유비·손권 연합군 입장에서는 적은 수로 몇 배의 적을 물리친 영광의 전투요, 조조 입장에서는 압도적 우세의 군대를 거느리고도 처절한 패배를 맛본 치욕의 전투다.

하지만 잠시 고개를 들고 이것저것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허창에서 적벽까지 행군했던 25만 조조의 군대는 걸어갔을까 뛰어갔을까, 하루 밥은 몇 끼 먹었을까, 배불리 먹기나 했을까? 그 중 어떤 병사는 오랜만에 부모님을 뵈러 고향에 가다가 전쟁터에 끌려나와 내내 부모님 생각에 시달렸을 수도 있고, 그 중 어떤 병사는 남몰래 애인과 데이트를 즐기다가 끌려나와 애인 생각과 걱정에 애가 탔을 수도 있고, 그 중 어떤 병사는 틈만 나면 도망치려고 계획했다가 기회를 잡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했을 수도 있다. 총사령 조조는 다음날 진격을 앞두고 새 술 걸러 마시면서 시를 읊는 것이 관례였다지만, 어느 대장 어느 병사인들 다음날 전투를 앞두고 마음이 편했을 것인가! 수십만 군대가 맞붙어 싸웠던 전투에서 가장 먼저 적의 창에 찔린 병사는 누구였을까, 적이 쏜 화살에 맞을 뻔했는데 마침 앞에 있던 아군이 대신 맞아서 목숨을 살린 병사는 몇 명이었을까? 이렇게 조조의 군대만 해도 25만 가지 이야기가 있으며, 그들의 가족을 더하면 100만 가지 사연이 구구절절 이어질 것이다.

지금 내가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니, 어차피 심하게 시작한 비약을 좀 더 해보자면, 요즘 여기저기 말이 많은 ‘인문학’, ‘인문적 사고’ 이런 것이 사실은 어떤 석학을 모셔오고 어떤 과목을 강의하고 해서 길러지는 게 아니라, 스포츠 하이라이트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느긋하게 본경기를 보게 함으로써 길러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포츠 뉴스는 그냥 어느 팀이 어느 팀을 몇 대 몇으로 또는 어떻게 이겼다는 결과만 알려주고 하이라이트는 방송하지 말 것을 방송국에 건의하고 싶다. 기출 문제나 요점만 간추린 하이라이트란 참고서도 이젠 그만 봐야겠다. 세상에 사연이 없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높은 곳에서(하이)’ ‘빛을 비추어(라이트)’ 밝게 드러나는 것만 보려는 안일한 마음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내려와 손전등을 들고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아래에서 위로도 비춰보면서 가능한 한 만상의 사연을 모두 찾아봐야겠다.
굿바이 하이라이트!

□ 다음호 추천 릴레이 에세이의 필자는 류영하 백석대 교수입니다.


홍승직 순천향대·중어중문학과
필자는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탁오 평전』, 『유종원집』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중국고전 번역 활성화를 위한 제언」 등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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