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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연구와 출판이 함께 살아나려면
학술 연구와 출판이 함께 살아나려면
  • 교수신문
  • 승인 2013.11.1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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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한때 번역서의 표지나 판권장에 번역가의 이름을 내걸지 못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내로라하는 원로 교수가 젊은 시절에 생계를 위해 날림 번역이나 이른바 쪽 번역에 나섰노라 하는 회고도 심심찮게 본 성 싶다. 번역가에 대한 천대라든가 번역료의 문제야 신물이 나도록 떠들어온 문제 가운데 하나다. 그나마 번역서가 연구 업적으로 인정된 것만 해도 감지덕지한 노릇 아니겠는가? 비록 저서의 절반, 학술 논문 한 편의 값어치만 매겨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번역과 번역가에 대한 푸념만 해도 장광설로 이어지기 십상이거니와 편저와 편자까지 떠다밀며 하소연을 늘어놓는 일은 오히려 민망하다. 편저의 숨은 주어로서 편자 혹은 편저자란 말할 나위도 없이 번역가보다 한 수 아래, 원저자보다는 두 수 밑의 자리에 놓일 터다. 아닌게 아니라 편저와 편자도 언젠가는 번역서와 번역가 정도의 푸대접이나마 받게 될 날이 올까?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알량한 푼돈이라도 아끼고자 하는 출판계, 특히 다종 소량 출판으로 먹고 사는 학술 출판계의 몸부림 탓도 적지 않다. 물론 인문 교양 출판과 준별되는 학술 출판의 독자적인 존립 의의와 다종 소량 출판의 가치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편자의 몫이야 편집부에서 얼마든지 대신할 수 있는 데에다가 고작 5% 안팎의 인세 지출이라도 줄여야 살아남으리라는 생각은 강퍅해서가 아니라 자충수라서 문제다. 지금도 종종 눈에 띄는 일이 없지 않듯이 번역가 이름을 내걸지 않고 번역된 책이 어떤 운명에 처하는지 떠올려 보면 알 일이다.


하지만 훨씬 더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은 저술이라면 꼭 전문 전서로만 제한해 온 학계의 오랜 관행, 게다가 최근에는 논문 두 편만 한 값어치밖에 쳐주지 않는 기괴한 계량 척도다. 번역서 한 권의 제값이 학술 논문 한 편이라는 발상, 편저가 저술에 들지 않는다는 해괴한 차별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며 어떤 결과를 불러올 것인가? 대학 교수들은 왜 자신의 업적이나 이력을 적을 때 번역서와 편저를 빼놓는 걸까? 작가 연보나 작품 목록에서 이혼과 재혼 경력은 꼭 집어넣으면서 번역의 흔적이라면 모조리 빠뜨리곤 하는 것도 그런 탓인가?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사족 삼아 덧붙이자. 지금까지 편저와 편자를 중심에 두고 논의했지만 실상 번역과 번역가에 대해서도 매한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한국 근대문학사 연구를 헐뜯다시피 한 이런저런 군말 역시 외국문학 연구, 비교문학 연구, 번역의 문제로 바꿔치기해서 읽어도 그다지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예컨대 지금 우리 시대의 한국인이 명탐정 셜록 홈스나 괴도 신사 아르센 뤼팽을 완역이자 전집으로 만나게 된 것도 십 년도 채 못 된 일이다. 백 년 만에야 가까스로 시도된 쥘 베른 컬렉션조차도 결국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남아 있는 형편이다. 그러고 보면 톨스토이 전집, 인간 희극 총서, 루공 마카르 총서를 한국에서 읽고 한국어로 상상한 한국인은 아직 출현한 적이 없다. 한심하기 짝이 없고 부끄럽기 그지없는 노릇 아닌가?


번역서에 대해서나 편저에 대해서나 학계의 곱지 않은 눈초리와 게으름은 결국 학계를 망칠뿐더러 인문 출판 시장의 토대로 무너뜨리고야 말 것이다. 거꾸로 말해 함께 살릴 수 있는 길도 있다는 뜻이다. 아닌 말로 톨스토이 전집, 인간 희극 총서, 루공 마카르 총서를 번역할 곳, 이인직과 이해조 관련 자료를 갈망해 펴내고 이광수와 최남선의 전집을 새롭게 改備할 수 있는 곳이라면 수백 명의 학생, 수십 명의 대학원생과 박사가 포진해 있는 대학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특히 전집이나 기획 총서의 번역 또는 편저는 작가 연보와 작품 목록부터 차근차근 정비하고 새 자료를 발굴해 재조명하는 일이 앞서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니 그야말로 학술 연구의 첫출발이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대학에서 우수한 번역가나 높은 안목을 갖춘 기획 편저자를 훈련시킬 수 있을 테고, 고급 독자를 양산해 내는 출판계의 든든한 배후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한편 출판계는 대학에 개입함으로써 미지의 수요를 새로운 공급으로 재발견해 가며 경직된 시장의 질서를 재편할 수 있지 않을까? 서로 손을 잡긴 해야겠는데 과연 누가 먼저 손을 내밀 것인가? 해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 이 글은 박진영의 『책의 탄생과 이야기의 운명』(소명출판, 2013.8)에서 발췌한 것이다. 저자 박진영은 연세대 화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연세대 연구교수로 있는 그는 번역가의 탄생과 근대 동아시아의 번역으로 연구시야를 넓혀가고 있으며, 문학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자료를 찾아내 정본으로 펴내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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