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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읽기> 『김수영 다시읽기』와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
<비교읽기> 『김수영 다시읽기』와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
  • 교수신문
  • 승인 2000.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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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0-31 00:00:00
김명인 / 인하대 강사·국문학

김수영은 왜 아직도 중요한 연구대상인가. 우선 풍부한 문제성과 다양한 해석가능성을 산출하면서 이른바 리얼리즘/모더니즘의 이항대립 구도로는 포착되지 않는 독특한 작품세계, 전후에서 6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그가 차지했던 문학사적 위치, 그리고 어느 정도 권위를 인정받는 합의된 평가의 미정립 등이 그를 향해 부단한 학문적 도전이 집중되도록 한 일차적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오랜 ‘인기’를 다 설명할 수 없다. 자신의 삶과 삶의 조건들을 가차없이 직시하는 정직성, 시와 삶의 정체를 거부하고 이를 끝없이 고양시켜 가고자 한 치열성, 시와 삶의 근원에 이르고자 한 그의 강박에 가까운 갈망과 갑작스런 죽음의 극적인 대비 등 그의 삶과 시에 깃든 ‘정신의 영웅’으로서의 풍모는 많은 젊은 문학지망생들과 연구자들을 매혹시켜왔는데, 그것이 그처럼 오래도록 김수영이 연구와 비평의 대상이 됐던 또 하나의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왜 아직도 김수영인가
올해 들어서도 김수영에 관한 책이 두 권이나 나왔다. 김승희가 엮은 ‘김수영 다시읽기’와 김상환이 쓴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이 그것. 분류하자면 전자는 김수영에 관한 1990년대의 연구사적 성과물의 집적으로 ‘학문적 도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후자는 한 철학자의 독창적인 김수영 해석서로 김수영에 대한 ‘매혹’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수영 다시읽기’는 편자 김승희를 비롯한 열 두 명의 연구자 및 비평가가 참여해 90년대 김수영 연구의 방향성과 성과의 일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 책이다. 최두석의 ‘김수영의 시세계’, 최동호의 ‘김수영의 시적 변증법과 전통의 뿌리’, 유재천의 ‘시와 혁명’을 비롯 김기중, 정남영, 김정환의 논문은 김수영 작품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일관된 성격 혹은 기저를 밝히고자 한 글들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이 내세운 문제의식들은 2백편도 넘을 기존의 연구성과들의 어디선가에서 한번쯤은 제기되고 논급됐을,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특별히 김수영 연구사에 어떤 획을 긋는 데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라 여겨진다. 다만 김정환의 ‘벽의 변증법’이 실증의 충실성 여부를 떠나 김수영 문학의 변환점이 4·19가 아닌 6·25라거나 그의 시적 이력이 열린 발전과정이라기보다는 역사의 벽에 가로막혀 닫힌 심화과정이라는 등 비교적 도전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김상환의 ‘김수영과 책의 죽음’, 김혜순의 ‘문학적 ‘장자’와 김수영의 시 담론 비교연구’를 비롯, 권오만, 강은교, 김승희, 이은정의 글들은 김수영의 문학에 대해 비교문학, 신화비평, 수용미학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을 시도한 성과들이지만 방법과 텍스트의 유기적 결합의 밀도 문제, 즉 ‘방법에 끌려가는 해석의 자의성’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상대적인 양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의 나태와 안일 때문에 김수영 연구가 유기적으로 계승·극복되지 못하고, 연구사적 낭비의 악순환에 빠져 있는 데 기인한다. 아직도 무려 17년 전 김수영 전집의 한 부분으로 나온 ‘김수영의 문학’에 실린 낡은 비평적 에세이들이 주요한 참고문헌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새롭게 밝혀진 전기적 사실조차도 이후의 논문이나 평론에서는 무시되기 일쑤인 것이 현실인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김수영 연보에도 김수영의 일본 유학 및 6·25 당시 인민군 참여 경위와 관련해 이미 선행논문에서 수정된 사실들이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것 역시 연구의 낙후성을 말해주는 사례다.
김상환의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은 한 철학자의 외도의 결과라 치부할 수 없는 ‘열정과 수고’의 흔적을 역력히 담고 있다. 이 책은 자신이 서문에서 고백하듯이 “김수영에 대해 쓸 때마다 날개를 달고 비상하는 기분을 만끽”한 사람이 아니면, “그의 시와 산문을 대하면서 남루하고 고단했던 한국의 현대사를 사랑할 수 있게” 된 사람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매혹과 열정의 소산인 것이다.
저자의 해석은 기왕의 해석과 비평들이 채 가 닿지 못한 독창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해석의 지평에 도달하고 있다. 이를테면 김수영의 ‘VOGUE야’, ‘헬리콥터’ 등에서 서구 문명의 산물에 대한 선망이 형이상학적 차원으로까지 승화되는 양상을 포착하며 “모더니티를 갈구하면 할수록 후진국의 모더니스트는 낭만주의자로 전락한다”는 인식을 얻고, ‘사랑의 변주곡’을 그 열등감과 콤플렉스를 후대에 물려주지 않으려는 배제와 희생의 광기의 표백으로 읽는다거나(‘모더니즘의 체험’), ‘후란넬 저고리’를 피로와 긍지 사이의 모순과 일치로 읽는다거나(‘풍경의 미학’)하는 것은 기존의 해석들이 미처 이르지 못한 지점이다. 이러한 눈에 번쩍 띄는 탁월한 시 읽기는 칸트와 데카르트, 하이데거 등에 기초한 저자의 견고한 시론을 바탕으로 하는, 품격을 제대로 갖춘 시 읽기로서 높은 설득력을 지닌다.

철학적 통찰력 돋보인 ‘풍자와…’
하지만 문학전공자가 아닌 철학전공자로서의 한계가 없을 리 없다. 기존 연구사에 대한 검토가 없고 전기적 사실과의 연관성을 결여해 자의적 해석, 혹은 과잉 해석의 함정에 빠진다든지(이를테면 시 쓰는 김수영만 있고 생활하는 일상의 김수영은 이 책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시의 문법을 무시하고 작품을 임의로 분절해 읽는다든지, 용어와 개념을 자의적으로 구사한다든지, 시 해석에 철학적 사변이 지나치게 개입돼 난삽하게 중언부언하는 경우가 많다든지 하는 사례가 적잖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옥의 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티는 그야말로 티일 뿐, 이 책은 그저 흔한 ‘철학과 문학의 만남’이 아니라 질적으로 답보하고 있는 김수영 연구에 신선한 자극을 줄, 깊이 있고 독창적인 통찰과 해석이 담긴 기념비적 노작으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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