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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들의 비루함 또는 역사의 아이러니
살아남은 자들의 비루함 또는 역사의 아이러니
  • 교수신문
  • 승인 2013.11.1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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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33_ 4·19국립묘지

 

▲ 가을비가 내리는 11월, 수유리 국립 4·19민주묘지가 비에 젖고 있다. 어느 시인의 시처럼, 비가 와도 이미 젖은 자들은 젖지 않을 것이다. 사진 최익현 기자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4·19묘지는 1963년 묘지가 처음 조성될 때에는 ‘4·19묘역’이었다가, 1995년 문민정부 시절에는 ‘4·19국립묘지’로, 참여정부 시절에는 ‘국립 4·19민주묘지’로 명명됐다. 명칭의 변화는 단순히 단어의 차이를 넘어 명칭을 부여한 자들이 지향한 정치적 속내를 반영하고 있다.


초가을 4·19묘지는 색깔 입은 단풍나무 사이로 가을 맛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여가공간이다. 북한산에서 막 내려온 여유로운 등산객, 발랄하게 묘역 주위를 걷는 아주머니, 유모차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갓난아이, 잠깐의 휴식을 즐기며 산보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여기가 엄숙한 민주성지라는 느낌을 발견할 수 없다. 다만 무심코 지나치는 나들이객 옆으로 주변 조경수보다 좀 값나가게 보이는 기념식수 제공자의 면면에서, 그리고 기념관에 민주화를 위한 염원을 한마디씩 쓴 명사들의 방명록에서 이곳이 단순한 휴식공간만이 아니구나 하는 인상을 받는다.

정치적 전시장이 된 역사의 길목
1993년 4월 19일 김영삼 대통령이 30년 만에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4·19묘역을 참배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문민정부가 미완의 혁명에 그친 4·19의 목표와 정신을 계승해 완성하겠다고 선언하면서 4·19묘역을 국립묘지의 수준으로 격상시켜 민주화의 성지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군사정권에서 대접받지 못한 묘역을 국립묘지로 만들고 성역화해 문민정부는 뭔가 다르다는 정치적 효과를 노렸다. 군사정권과의 합당이라는 정치적 약점을 극복해 보려는 탈출구였다.

4·19의 이념을 교과서에 반영하고, 지식인들로 하여금 군사정권에서 ‘의거’로 취급돼 오던 의미를 ‘혁명’으로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이와 동시에 1963년 박정희 정권이 조성한 ‘4·19묘역’의 흔적을 없애고 ‘4·19국립묘지’로 새 단장을 마쳤다. 이 국립묘지를 통해 문민정부가 군사정권과 차원이 다르게 보이길 기대했던 것이다.


4·19는 1950년 내내 벌어진 부산정치파동, 사사오입개헌, 각종 비리사건 등 이승만 정권이 만들어낸 비민주적인 정치행태와 인권탄압에 대한 시민과 학생들의 저항이었다. 1960년 부정선거는 이승만 정권 스스로가 자기한계를 드러내는 계기였다. 1960년 2월 대구학생들, 3월 마산 민중들이 불을 지핀 저항은 서울을 돌아 다시 전국을 강타했다. 이기붕 가족의 자살, 이승만의 하야로 이어진 혁명의 성과는 민주당 정권이 등장하면서 폭발했다.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숨죽이고 있던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과 통일운동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하지만 진정한 혁명의 성과를 달성하기도 전에 5·16군사쿠데타는 모든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4·19혁명이 일단락된 직후 저항주체들은 저항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한 기념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오늘날 4·19혁명과 관련된 저항의 공간에는 기억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학생들이 진격했던 서울시청, 시의회, 광화문 앞과 청와대로 향하는 길목 어디에도 당시의 의미 있는 행동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라곤 전혀 없다. 다만, 서대문역 근처 옛 이기붕의 집이 4·19혁명기념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사정이 이런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승만이 물러난 뒤 학생대책위원회는 서울 시청 앞에 위령탑을 제작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했고, 유족회는 서울 남산에 ‘4월 공원’ 조성을 준비했다. 학생과 시민들은 민주화를 외치며 피를 흘린 공간에 기념탑과 공원을 세우려 했다. 5·16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권은 ‘혁명의 완성자’로 자처하면서도 저항주체들을 제외하고 국가주도로 기념탑과 공원을 조성했다.

‘친일 조각가’와 그들만의 민주성지
군사정권은 쿠데타라는 도덕적 결함을 독재와 불의에 대한 저항의 전통과 결합해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서울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수유리 북한산 자락에 묘역을 조성하고 기념탑을 건립했다. 기념탑은 친일 조각가로 알려졌던 김경승이 맡았고, 글은 이승만정권에 저항하던 학생과 시민을 빨갱이, 폭도로 매도하던 이은상이 지었다. 저항주체들이 제도화하려고 했던 기억을 지배권력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정당성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자기 권리를 빼앗긴 저항주체들은 국가의 포장을 거부하고 기념식에 불참하는가 하면, 자해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학생들은 독자적인 의례를 추진했다. 점차 4·19가 군사정권에 저항적인 의미로 부각되자 1963년부터 대통령은 기념식에 참석하지도 않고, 서울운동장이나 효창운동장에서 진행하던 기념식 또한 실내체육관으로 축소됐다. 군사정권 아래에서 숨죽이던 저항주체들은 1980년 광주항쟁을 지나면서 ‘4월제’, ‘4월혁명제’로 다시 4·19혁명을 불러내면서 군사정권의 비민주적 행위에 저항하는 전략적 자산으로 활용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명령으로 1995년 새롭게 조성된 국립묘지에는 4·19의 영혼들에게 바치는 ‘수호예찬의 비’ 12편이 큼직한 화강암에 새겨져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시인의 대다수는 5·16 이후 결성된 시인협회 간부들로 1970~80년대 관변단체 회원들도 포함돼 있다. 현실 참여시 창작에 반대하고 5·16쿠데타의 일관된 지지자도 있었고,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에서 관료를 지낸 인물들도 포함돼 있었다. 12편의 시를 선정하는 절차상 하자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문민정부가 그렇게 절교하고 싶었던 군사정권과 결탁했던 문인들의 회생으로 ‘국립4·19묘지’의 의미가 살아날 수 있을까.


4·19 당시 학생과 시민들의 열망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는 4·19기념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기념관 전시내용은 이승만 정권의 비민주적인 정치행태, 3·15부정선거와 국민들의 분노, 전국적인 저항을 다양한 해설과 당시의 증빙자료, 동영상의 형태로 관람객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관람객들은 이승만의 하야와 민주당 정권의 탄생에서 4·19혁명의 성과를 맛보는 데 그쳐야 한다. 실제 역사적 사실에서는 이후로도 4·19혁명을 완성시키기 위한 다양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관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차철욱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조교수
필자는 부산대에서 박사를 했다. 한국현대사가 전공이며, 논문으로는 「한국전쟁 피난민과 국제시장의 로컬리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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