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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代로 이어지는 ‘흐르는 술’의 깊은 향취
5代로 이어지는 ‘흐르는 술’의 깊은 향취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3.11.11 1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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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_ 16. 문배술 - 이기춘 무형문화재 제조기능보유자


 
문배술의 원래 用水는 평양샘물입니다. 만약 평양의 주암산 샘물로 문배술을 빚을 수 있다면 그 자체가 ‘남북한 합작술’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통일을 앞당기는 역할까지도 기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문배술은 1천년 이상 이어져 오는 우리나라 전통 술이다. 문배술은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증류식 소주다. 곡물을 발효·증류·숙성시켜 만드는 소주는 제조과정에서 희석식과 증류식으로 나눈다. 희석식은 곡물발효액을 연속식으로 증류시켜 알코올 도수를 95도 이상으로 만든 후 물 등을 섞어 20도 대까지 묽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증류식 소주는 곡물발효액을 단식으로 증류시켜 알코올 도수를 30~40도까지 올린 것을 말한다. 우리가 요즘 흔히 마시는 일반 소주는 희석식이다. 문배주는 증류식 소주의 대표적인 것으로 우리나라의 소주를 대표하는 전통소주이다.


문배술은 우리의 재래종 배로 토종돌배인 문배의 꽃과 과실향이 난다고 해서, 오래 전 선조들이 그렇게 부르는 바람에 붙여진 이름이다. 문배나무에서 열리는 배의 향기는 일반 배가 도저히 따르지 못할 정도로 진한 향을 낸다. 그러나 문배주에는 문배나무의 과실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조와 수수만으로 배합비율을 맞추고 적정 온도를 유지해 문배의 향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에 문배술만이 갖고 있는 매력이 있다. 문배술의 향은 청초하다. 그리고 마시고 난 후에도 진하게 가슴에 남아 개운하면서도 마시는 이의 마음에 길고 긴 여운을 남긴다. 그래서 문배술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國酒’로 손색이 없는 것이다.

平壤전통 문배술가문의 4대 전수자
문배술은 원래 평양이 원산지다. 평양에서 많이 재배되는 찰수수와 메조를 발효·증류시켜 만든 소주다. 대동강 유역 주암산의 석회암층에서 솟아나오는 지하암반수를 용수로 해 만들어져 고려조 때 왕에게 진상되던 술이다. 기록으로 전해지기는 고려중엽 시인 김기원의 미완의 시 한편이 있다. “대동강 동쪽으로는 끝없는 산이 이어지고, 성 한쪽으로는 강물이 질펀하게 흘러가는데…(大野東頭點點山 長城一面落落水)”라는 시인데, 김기원이 대동강변 연광정에서 문배술에 흥에 겨워 여기까지 써놓고 다시 한 잔하기 위해 붓을 멈춘다. 그런데 동석한 시인과 화가들이 서로 앞다퉈 문배술을 다 마셔버려 술이 다 떨어졌다 하자 그는 “술이 떨어지고 없으니 시흥도 일어나지 않는다”며 붓을 던졌다는 일화가 전한다.

 


북한의 평양이 고향인 문배술이 용케도 살아남아 전통방식 그대로의 소주로 아직까지 주당들의 입맛을 돋우고 있는 것은, 이 술의 제조방법을 옛날 방식 그대로 이어받아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장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문배술 4대 계승자인 이기춘(71세) 선생이다. 그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평양의 문배술을 150여 년 전에 다시 살려낸 증조모 박씨 할머니의 계승자이다. 물론 그 과정에 할아버지인 이병일(1895~1955), 아버지 이경찬(1915~1986)이 있다. 그러나 이 세분의 활동 시기는 북한에 국한된 것이었고, 남한에서 문배술을 다시 활짝 꽃 피우게 한 것은 이기춘의 역할이 컸다.


“오늘날 문배술의 원조는 증조모 박씨 할머니입니다. 증조모께서 문배술을 잘 만들자 증조부가 공장을 차리셨지요. 그 게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제게 이어진 것입니다. 제가 전주 이씨 平章事公派 21대손인데 평양에서 9대째 살았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그의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는 쉽게 상상이 간다.
“제가 3남2녀의 장남인데, 누룩방에서 태어났고 누룩 뜨는 냄새와 술 익는 냄새를 맡으며 자랐었지요. 커다란 양조장이 제겐 하나의 세계였습니다.”
문배술은 1940년대 평양 ‘평천 양조장’에서 만들었다. 공

장이 감흥리, 우포리, 성교리 3곳에 있었고, 문배술에 대한 수요가 커 그 규모와 매출은 엄청났다. 평천 양조장이 내는 세금이 당시 평양시의 1년 예산과 맞먹을 정도였으며, 외국에도 판로를 개척해 문배술을 실은 트럭들이 중국과 러시아를 오갔다고 한다. 이기춘은 당시 할아버지, 아버지의 양조장과 가문의 부가 어느 정도인지를 다음과 같은 말로 대변한다.


“당시 조선 최고의 부자가 화신백화점 소유주인 박흥식이었지요. 부친은 ‘박흥식이는 부동산만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현금장사잖아’라고 했어요. 지하실에 돈이 가득 찰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문배술은 1950년 6·25를 계기로 평양에서의 양조장을 접는다. 그 곳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온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일가 식솔들을 트럭 20대에 태우고 남쪽으로 향한다. 서울, 부산을 거쳐 제주도로 갔다가 거기서 1년여를 머문 뒤 부산으로,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왔다. 하월곡동에서 1952년부터 문배술을 만들어 팔았다. 그러나 1955년 정부의 양곡관리법에 의해 곡식으로 만드는 모든 술의 생산이 금지됐고, 이후 20여 년 간 문배술 생산이 중단된다. 그 당시 생산해 팔 수 있었던 술은 밀가루로 만드는 막걸리와 희석식 소주, 그리고 맥주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이경찬은 희석식 소주는 술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아버지는 ‘희석식 소주는 술이 아니다’며 증류식 소주만 고집하셨지요. 희석식 소주는 아예 만들지 않았으니까 소주사업도 접은 거나 진배없었지요. 그러면서 제사 등 집안행사 때마다 법에 걸리지 않을 만큼의 문배술을 빚어 사용했지요. 그렇게 해서 명맥만 유지한 것이지요.” 그 많던 재산이 물에 녹는 소금처럼 사라져 갔다. 단성사 옆 고래등 같던 기와집도 없어졌고, 양조장마저 넘어갔다.


이기춘은 경복고를 나와 한양대 상대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엔 문배술과는 인연이 먼 도정이 펼쳐진다. ROTC로 군복무를 마친 뒤 보사부 공무원를 거쳐 1973년 대한항공에 입사, 17년 동안 경영조정실 등에서 일했고, 가는 곳마다에서 인정도 받았다. 하지만 문배술이 그를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운명 같은 것이었지요. 집안 형편도 그랬고 무엇보다 문배술을 계승하신 아버지를 이어 문배술을 후대에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또 그런 계기도 주어졌지요.”


그 계기란 오랫동안 금지돼왔던 문배술 제조 및 판매허가가 전두환 정권 때 부활되면서부터 문배술이 전통술로서 국가관리 체제로 들어가면서 부터이다. 1986년 아버지 이경찬이 중요무형문화재 문배술 제조기능보유자로 지정된다. 그는 아들과 후계자로서 ‘교육장학생’이 된다. 그렇게 해서 다시 양조장을 차리고 가업을 잇게 된다. 그 게 1990년 6월 18일이고 그와 그의 아버지가 다시 은은한 배향(香)나는 문배술을 다시 빚기 시작하는 데 30여 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그러나 어려웠다. 우선 돈이 없었다.


“공장을 만들어야 했는데 돈이 한 푼도 없었어요. 은행에서 500만 원을 빌렸고, 사채로 2천만 원을 빌렸지요. 사채를 두 달 쓰는데 이자가 1천만 원이나 됐습니다. 양조장은 보일러와 독이 있어야 되는데, 그 때 신형보일러 살 돈이 없어 헌 보일러를 사 개조했습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 다시 시작한 문배술을 세상에 알리기도 쉽지 않았다. 변변한 광고나 홍보할 여유도 없었고 ‘북한 술’이라는 다소 부정적인 인식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천운의 기회는 의외로 뜻하지 않은 곳에서 생겨난다. 1990년 7월 서울에서 개최된 남북총리회담이 그 것이다.
“당시 강영훈 총리와 북한 연형묵 총리 간 회담이 잘 안 되고 있었지요. 저녁식사 때 강 총리가 연 총리를 달래려 자꾸 양주를 따라 줬답니다. 연 총리가 그 걸 마시지 않고 맨 끝에 놓여있던 문배술을 마시더니 ‘거! 이거 좋구만 기래’라고 했어요. 그 게 신문에 보도되면서 난리가 났지요. 그 후 북한방문단이 돌아가면서 가전제품, 팬티, 양말 등은 모두 손도 안대면서 문배술만 가져간 것이 또 보도되면서 문배술에 대한 호기심이 인기몰이를 했지요.”


그 때부터 문배술은 날개 돋친듯 시중에 팔려나가기 시작했고, 나라를 대표하는 ‘국주’로서의 역할을 한다. 1991년 한·소련정상회담 만찬장, 노태우 대통령의 유엔방문 기념파티에 문배술이 건배주와 만찬주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나눠 마시면서 ‘대한민국을 알리는 술’로 그 진가가 발한다.


이기춘의 문배술은 현재 경기도 김포 서암리의 양조장에서 빚어진다. 문배술에 쓰이는 물은 김포 지하수다. 그러나 원래 문배술은 앞에서도 언급했듯 대동강 유역 주암산의 석회암층에서 나오는 지하 암반수를 용수로 썼다. 그 쪽 석회암층에서 솟아나는 지하 암반수는 강한 산성을 띠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물의 성질이 문배술에서 우러나오는 콕 쏘는 듯 강한 느낌의 문배향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이기춘은 그래서 오래전부터 대동강 유역의 지하 암반수를 들여오려 많은 애를 써 왔다.


“2000년 6월 평양 남북정상회담 때 문배술을 맛본 김정일이 ‘원래 문배술은 평양 대동강 일대의 주암산 물로 만들어야 진짜배기’라고 말한 것도 한 계기가 됐지요. 정말 정통의 문배술은 주암산 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그 때부터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이기춘은 그 후 정부 승인을 받아 중국과 일본 등에서 북측 인사들을 수도 없이 만나 평양 현지공장 설립 등을 제의한다. 그러나 북측의 반응이 문제였다. 만날 때마다 “화끈하게 투자하시오”라는 애매모호한 말만 되풀이할 뿐 더 이상의 진척은 없었다. 공장 설립에 앞서 현지 여건 실태조사 등 같은 구체적인 얘기는 없이 그저 무조건 투자부터 하라는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남북관계가 꼬여가면서 그냥 그런 상태로 현재에까지 이르고있어 답답하기 짝이 없다.

나라를 대표하는 ‘國酒’로 우뚝 … 세계에서도 인정받아
‘평양 샘물로 제대로 빚겠다’는 이기춘의 10여 년간에 걸친 이런 생각은 그래서 아직도 진행형이다. 지난 2008년에는 몽골을 방문해 북한의 물과 한국의 양조기술을 합쳐 그 곳에서 문배술을 빚기 위한 제안을 몽골정부 측에 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 물을 그 곳으로 끌어오는 문제가 의외로 난관에 부닥쳐 지지부진한 상태로 있다. 이기춘은 문배술 용수로 평양샘물을 쓰고자 하는 이유에 대해 술맛과는 별도의 의미를 강조한다.


“만약 평양 주암산 물로 문배술을 빚을 수 있다면 이 자체가 ‘남북한 합작 술’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클 것입니다. 문배술의 브랜드 이미지도 물론 많이 올라갈 것이지만, 한편으로 통일을 앞당기는 역할까지도 기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문배술은 이제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하는 추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추진 중에 있다. 유네스코에서 직접 김포 양조장을 방문해 현장 심사 등도 했고, 관련 자료도 보냈다. 문배술에 대한 글로벌적인 관심은 세 가지 곡물을 원료로 발효와 증류, 숙성과정을 거쳐 만드는 독특한 방법 때문이다. 술을 만드는 과정에서 밑술을 증류해 소주를 내리면 처음에는 65도에 달하는 진한 술이 나오다 차츰 묽어진다. 문배술은 알코올 도수를 40도에 맞춘 술이다. 이 수준이라야 맑고 진한 문배향이 입 안 가득 남게 되고 뒤끝 또한 개운한 문배술 특유의 향취와 酒氣를 준다고 한다.


이기춘은 아버지 이경찬에 이은 문배술 기능보유의 중요무형문화재이다. 그에 더해 지난 1995년에는 ‘식품명인’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는 문배술의 독특하면서도 청아한 향취와 그 도수를 지켜내기에 아직도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술을 만들어 팔지만 돈에 대한 욕심은 없습니다. 나라를 대표하는 국주를 보전하고 전수한다는 신념을 지킨다는 것, 그리고 조상들로부터 이어진 훌륭한 술을 그 맛 그대로 만들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노력은 증조모,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원칙으로 좋은 술을 만들려는 신념에 다름 아니다. 그의 이러한 신념과 노력은 5대 전수자인 아들 이승용에게 이어지고 있다. 흐르는 술이고, 흐르는 문배술이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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